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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Mar 18. 2024

끝과 시작

끝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는 거였다.

3년 만에 아이폰을 동기화하다가 오류가 났다. 대수롭지 않게 전원 버튼을 꾹 눌러댔지만, 오류 화면은 사라지지 않았고 폭풍 검색을 한 결과 이것은 실로 엄청난 사태였다.      


다한증이 심한 두 손바닥에서 땀이 콸콸 쏟아지고 정수리부터 등줄기를 따라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촉촉한 눈을 하고 인터넷에서 제시한 해결방법을 시도했지만 무시무시한 화면은 바뀔 생각이 없다. 두 손이 달달 떨려온다. 내일 제일 이른 시간으로 서비스센터 예약을 걸어두고 다시 시도해 본다. 이렇게 간절한 적은 오랜만이다.     


혼자라는 사실을 통감했다. 호들갑스럽게 발을 동동 굴려대는 액션을 선보일 수 없다는 사실이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죽을 때가 되면 생명 연장 따위 하지 않고 쏘쿨하게 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헛된 망상이었구나. 아이폰 따위가 나를 이토록 두렵게 하다니. 재밌네.     


살려낸 아이폰이 나에게 ‘HELLO’ 말을 건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토록 뛰던 심장은 거짓말처럼 차분해졌고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남겨졌다. 기억에 의존해서 전에 깔았던 앱 리스트를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은행, 주식, 카드 앱부터 시작해서 자주 쓰는 쇼핑 앱을 마지막으로 하나씩 복구해 나갔고 예전 상태의 95%쯤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 시계는 새벽 4시를 향해 있었다.    

  

끝이 있어야 시작할 수가 있는 거였다.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시작하면서 끝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초기화된 아이폰을 붙잡고 4시간 동안 고군분투한 일이 왜 일어났을까. 당시엔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에 전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예행연습 같은 게 아니었을까. 일주일이 지난 지금 그런 생각이 든다.   

  

한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끝이다. 믿기 힘들 만큼 덤덤하다. 지난 1년 10개월이 그 마음을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이 상황을 인정하고 내려놓고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이었고 그 시간이 나에게 주어질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그 시간 동안 시간의 힘을 믿지 않게 되었고 동시에 시간의 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인연의 덧없음을 인연의 소중함을 혼자됨의 사무침을 혼자됨의 자유로움을 겪었다. 사랑임이 분명했지만 내가 했던 사랑은 내가 썩어 문드러지는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고 무엇이 사랑인지를 그렇게 어렵던 사랑이라는 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다만 안도감이 밀려든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의 마음이 가장 나다워서 편안하다. 아이폰을 복구했듯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겠지만 끝난 걸 알면 앞만 보고 달려드는 인간이므로 어찌어찌 나는 잘 해쳐 갈 것이다. 완전히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지만 시작임에는 분명하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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