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비 Feb 20. 2024

통증을 대하는 자세

살이 타는 냄새를 맡으며

내 주변 여자들은 출산의 통증을 그저 많이 아프다 정도로만 말하는 담대한 이들이었다. 설사 무시무시한 비유를 곁들이며 장황하게 설명했다 한들 출산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영역에 있으니 그 통증을 알 길은 없었을 것이다.     


어설프게 타인의 통증을 가늠하고 판단하는 건 무례한 짓이다. 나는 내가 경험한 통증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사랑니 4개를 포함한 생니 8개를 뽑은 적이 있다. 출산을 논하다가 갑자기 발치를 말해서 당황스럽겠지만 통증에 가치를 매기는 것 또한 무례한 것이 아니겠는가? 흠흠. 어쨌든 나의 사랑니는 본의 아니게 상냥한 의사 선생님을 당황케 했다. 사적인 토크를 하지 않던 그는 그간 뽑아온 사랑니 중에 역대급이었다고 고백하며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호기롭게 오전 반차를 써서 사랑니를 발치하고 오후에 회사에서 쓰러졌다. 피를 많이 흘렸던 탓일 뿐 마취 주사와 진통제 덕에 아프진 않았다.(아마 나보단 의사 선생님이 더 힘들지 않았을까) 그 정도의 통증은 견딜만했다. 나름의 경험으로 치과 진료 중에 가장 아픈 것을 고르라면 단연코 마취 주사를 꼽겠다.  

    

생니 4개를 뽑고 잇몸에 4개의 나사를 박고 고무줄을 쪼아 주었던 교정과 선생님은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주삿바늘을 찔러 넣곤 했다. 세상에서 마취 주사만큼 아픈 건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무지막지한 통증이었다. 뇌까지 찔리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 상냥한 사랑니 선생님은 몸의 긴장을 빼라고 미리 일러주었다. 순간 여기가 명상 센터인가 싶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코로 숨을 내쉬면서 얼굴의 긴장도 하나씩 풀어보라고 말한다. 내 호흡이 진정된 것 같으면 벌어진 입가를 잡고 살짝궁 흔들었다가 슬며시 주삿바늘을 꽂아 마취액을 천천히 주입한다. 그 순간에도 아이코, 아이코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내가 다시 긴장하지 않게끔 응원하면서.   

   

그렇게 주삿바늘이 꽂히는 줄도 모르는 마취 주사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제는 마취 주사를 참 편안하게 맞는다는 칭찬까지 받는다.      


그에게서 통증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 통증을 목전에 두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몸의 긴장을 하나, 둘씩 풀어낸다. 머리, 얼굴, 목, 어깨, 팔, 배 엉덩이, 다리가 녹아내려서 흐믈흐믈한 해파리가 된다는 기분으로 이완의 자세를 취한다. 아프지 않을 거라는 기대보다는 그래 와라 내가 받아주겠다는 심정으로. 그러면 통증이 견딜 만한 것이 된다.      


지난주에 살이 타는 냄새를 맡으며 해파리는 별안간 깨달았다. 무려 16년 전에 체득한 이 스킬을 다른 통증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걷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 덩어리가 머리를 강타할 때, 밥 먹다가 등 뒤에서 누군가가 허리춤을 푹푹 찔러댈 때, 자려고 누웠는데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가슴팍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팰 때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해파리가 되어 콧구멍으로 숨을 씩씩 쉬면서 그래 네가 죽지도 않고 또 이렇게 왔단 말이지. 그렇다면 반길 순 없어도 받아는 드릴게. 얼마나 아픈지 한번 보자고 그렇게.

이전 09화 인생에 회사와 남편이 없어진 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