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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Jan 23. 2024

인생에 회사와 남편이 없어진 후

나, 겨울 좋아했네?

지난주부터 누가 흔들어 깨우기라도 한 것처럼 새벽 4시 30분에 퍼뜩 정신이 들어온다. 나의 몸은 절기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한다. 개장 전에 겨우 침대 밖을 빠져나왔던 몸은 입춘이 지나면 서서히 새벽 3시부터 잠을 설치게 되는 몸으로 바뀌게 되겠지.      


수면과 절기의 연관성을 자각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극심히 피로하면 오히려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없는데 나는 1년 365일 동안 피곤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저 회사를 탓하며 살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365일 피곤한 나의 몸뚱이를 마주하며 회사보다는 몸뚱이 자체가 문제였구나 싶었다.      


그러나 컨디션이 좋은 날에도 쉬이 숙면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자 시간이 남아돌아 넘치던 백수는 원인을 탐구하기 시작했는데 다름 아닌 절기가 나의 수면 상태에 지배적인 역할을 해온 것을 알았다.(혹시, 나뿐만 아니라 무릇 인간의 신체는 이러한 것인지?)     


잠을 잘 자는 시기는 오직 한겨울뿐이다. 봄, 여름, 가을에는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 단위로 잠을 설친다. 추위가 싫어서 겨울을 싫어한다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꿀잠을 포기하고 출근해야 하는 것이 싫은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웃풍이 심한 주택과 오래된 아파트의 가장 추운 방에서 지냈던 터라 공기에 따스함이 한 방울이라도 있으면 갑갑증이 일어나 잠에서 벌떡 깨던 나였다. 차가운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산책하는 게 상쾌하다며 연신 웃었으면서도. 유일하게 잘 먹는 과일이 귤이었음에도. 그러니까 나는 나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이 짜증으로 뭉뚱그려지고 예민함이 모든 원흉이 될 때 해소되지 못한 감정은 차곡차곡 쌓인다. 감정 하나, 하나를 들여다보는 건 품이 드는 일이었고 그러기엔 신경 써야 할 다른 일들이 많았다. 쌓인 감정들이 감당되지 않을 지경이 되면 나조차도 나의 감정을 짜증과 예민함으로 퉁치고 모른 척을 했다. 그것이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의 방식이라 여겼고 실제로 짜증과 예민함에서 기인한 일들도 많았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간편했기 때문에.      


인생에 회사와 남편이 없어진 후 모든 관심이 나에게로 쏠렸다.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여전히 자기혐오를 디폴트로 깔아놓고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님을 안다. 매 순간 뭘 하고 싶은지 그것이 해야만 해서 하는 것인지 타인의 시선 때문에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살펴본다. 대체로 내가 원하는 일이란 대단한 일이 아니므로 수월히 그 일을 해낸다. 그리고 나는 기뻐하게 된다.      


기꺼이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날. 나는 약속시간 2시간 전에 도착해서 스타벅스에 앉아 사람들이 오가는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내 두 발이 지면에서 둥둥 떠 있는 듯한 비현실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세상과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해방감에 가까운 자각. 사람들은 실재하지 않으나 실감 나는 게임 속 캐릭터 같았고 실재는 오로지 나뿐이라는 감각. 언제나 혼자가 아니었음에도 혼자인 듯 느꼈지만, 그 순간 나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2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멀리서 두리번거리는 친구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그녀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나를 발견해 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웃어 보였다. 우리는 실재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걸어갔고 나는 오랫동안 그 순간을 기억하리란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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