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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Oct 24. 2024

겨울을 기다리며 살았다.

1화

 단잠에서 깨어났을 때 사방은 이미 어둑해져 사물이 뭉뚱그려지고 있었다. 마땅히 옆에 누워있어야 할 엄마가 없다는 당혹감이 두려움으로 뒤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꺽꺽거리는 목구멍에서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를 듣고 옆집 아저씨가 뛰쳐 들어와 나를 달랬던 기억. 어쩔 줄 몰라하던 아저씨의 몸짓과 표정. 그것이 울음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다. 

 오후 5시 30분. 눈꺼풀의 무게감을 견디지 못하고 침대로 숨어들었다. 심장을 깔고 모로 누워 커다란 인형을 힘껏 껴안은 채 볼 언저리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가슴팍이 금세 포근해지고 제대로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이 로션으로 끈적이는 뺨에 들러붙었다. 차갑고 따뜻하다. 눈을 감고 주문을 외듯 중얼거린다. 

‘30분만 자자. 더는 안돼.’

 알람은 맞추지 않는다. 잠에 취한 눈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수시로 확인한다. 30분만 자기로 결심한 순간 편히 잠들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았다.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에 땀이 맺히는 게 느껴진다. 발끝이 달콤함으로 근질거린다. 차가웠던 이불이 체온으로 데워지고 모로 누운 어깨에 뻐근함을 느꼈을 땐 40분이 훌쩍 지나있었다. 사위는 여전히 밝았다. 

 남서향은 집은 오후 3시 30분이 되면 빛이 들이닥쳤다. 오렌지빛이 가득 찬 지금이 현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늦은 오후의 호사스러운 토막잠은 마땅히 있어야 할 누군가가 사라진 기분을 다시 끌고 왔다. 익숙해지지 않는 낯익은 두려움.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다 결심이 섰다는 듯이 푸른 인형을 옆구리에 끼운 채로 천장에 매달린 조명을 바라보았다. 유백색 유리 볼 4개가 기역 자로 꺾인 황금색 가지에 매달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또렷이 확인되었다. 

 얼떨떨한 채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가슴에 묵직한 안개가 가득 들어차 있는 것 같아 반복적으로 긴 한숨을 뱉어본다.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손바닥과 무릎으로 방바닥을 지탱한 채 짐승처럼 울었던 적도 있었다. 안개를 이기지 못한 코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방바닥은 금세 피로 얼룩졌고 온몸으로 피를 내뿜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벌써 5년 전 일이다. 

 다시 잠들기까지 6시간이 남았다. 밤에는 수시로 시계를 보지 않아도 자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므로 편히 잠들 수 있다. 밤이 오기를 기대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저 하루를 흘려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느낀다.

 잠들기 전에 내일의 날씨를 확인한다. 밤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과 함께 청명함이라는 단어가 주는 찰나의 순간이 좋아서 시작된 습관이다. 날씨 앞에 붙는 ‘한때’나 ‘대체로’의 표현도 맘에 든다. 한때 흐림을 보면 머물다 지나가는 그 순간을 버틸 수 있을 것 같고 대체로 흐림을 보면 온 세상이 같이 흐려 주어서 든든했다. 한때는 이글거리는 태양에 모든 기력을 빼앗길지라도 대체로 맑은 날의 여름을 좋아했고 지금은 대책 없이 맑은 날은 감당하기 버겁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사계절이지만 맞이하는 사계절은 매번 달랐다. 몇 년 사이 싫어했던 겨울은 전에 없이 맘껏 웅크릴 수 있어서 부끄럽지 않았고 꽃과 잎이 움트는 봄은 가시가 돋친 것처럼 쿡쿡 찔러댔다. 파란 하늘에 치솟은 적란운은 언제나 기쁨이었지만 지금은 한때의 기쁨 정도가 되었고 거추장스럽기만 했던 비가 반가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벌레가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고 알리면 아쉬웠고 너도나도 결실을 맞이하느라 분주한 가을엔 무엇하나 쥐어지지 않는 두 손을 마주하기가 겁이 났다. 노랗고 빨간 이파리를 떨어뜨리듯이 붙들고 있는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벌거숭이가 되길 바라며 다시 겨울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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