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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Oct 24. 2024

여전히 그의 옷을 세탁한다.

2화

 사스레피 꽃에서 풍겨 나오는 계분 냄새가 올해의 봄을 알린다. 작년에는 기를 쓰고 꽃을 구경했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이 그래야 잘살고 있다는 게 증명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길가에 핀 자그마한 꽃 한 송이도 놓치기가 싫었다.

 오전 8시 30분에 울리는 전화. 평소라면 받지 않을 테지만 받아야만 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부동산입니다.

-네.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전화를 드렸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늘 오전 10시에서 10시 30분 사이에 방문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외출할 일이 있어서 11시만 넘기지 않으시면 괜찮아요.

-네. 늦어도 10시 30분은 넘기지 않을 거예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춘분이 시작되면서부터 누가 깨우기라도 한 것처럼 오전 6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전화가 왔을 때는 이미 오트밀로 만든 빵과 커피로 배를 채우고 막 양치질을 마친 참이었다. 식욕이 사라진 후로 저녁은 자연스레 먹지 않게 되었고 아침엔 참을 수 없는 허기짐이 몰려왔다. 전기 포트로 물을 끓이는 동안에 빈 머그잔에 인스턴트커피를 쏟아붓고 전날 설거지해 놓은 그릇들을 정리한다. 냉장고에서 밀폐 용기에 담아둔 빵을 꺼내 전자레인지로 데우는 동안에 전기 포트에서 딸깍 소리가 난다. 그 순간만큼은 원하는 대로 인생이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포크 날로 빵을 잘라내 입안에 집어넣고 한참을 공들여 씹다 보면 짠맛과 함께 오트밀의 풍미가 올라왔다. 뻑뻑한 빵을 뜨거운 커피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는 일이 오늘의 아침과 내일의 아침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앞 베란다 타일 바닥 위에 짝을 맞춰 널어놓은 양말들을 쪼그려 앉아 하나씩 정리했다. J의 양말이 손에 쥐어질 때마다 만지면 안 될 걸 건드린 기분이 들었다. 창 너머로 바다의 윤슬이 반짝인다. 매듭 모양으로 정리한 양말을 늘어난 티셔츠 앞자락에 주워 담아 서랍장에 넣고 곧장 뒷 베란다로 향했다. 천장에 매달린 빨래 건조대에는 작년 겨울부터 J의 필파워 800짜리 윈드스토퍼 다운재킷과 경량 다운베스트, 무릎이 튀어나온 코듀로이 팬츠가 집요하게 걸려있다. 그것들은 내가 사라진 뒤에도 이곳에 매달려 있을 것이다. 

 뒷 베란다를 마주한 드레스룸의 창문을 열고 건조된 빨래를 걷어 창문틀에 하나씩 쌓아 올렸다. 대부분 J의 옷이다. J는 화장실 밖에 깔아 둔 발수건은 한 달이 넘도록 교체하지 않으면서도 그날 입은 옷은 두 번을 입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건조대 끄트머리에 숨기듯 널어놓은 팬티를 걷었다. 팬티는 반투명한 스판사가 터져 나와 번들거리고 안쪽에 프린트된 세탁 라벨 문구는 흐릿해져 읽을 수가 없다. 낡아빠진 팬티를 볼 때마다 새로 사야겠다고 다짐하는 게 일주일마다 반복되었다. 

 J의 옷을 세탁하고 반듯하게 게서 옷장에 차곡차곡 넣을 때마다 이 일을 기꺼이 하지 않게 된 자신을 마주했다. 노랗게 탈색한 긴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J의 겉옷과 팬티 안쪽까지 점령한 짐승의 털을 보면서도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은 때가 언제쯤이었지? 그때 나는 아무래도 그 짐승이 연갈색 포메라니안일 것 같다는 추측을 했고 개털이 날리는 곳에서 알몸으로 뒹굴었을 J를 향해 치를 떠는 대신에 그녀가 일하는 동안 혼자 집안에 남겨졌을 그 조그만 개를 걱정했었다. 

 나를 화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천장에 매달린 빨래 건조대였다. 높낮이를 조절하는 줄이 롤러에 껴서 나의 힘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빨래 건조대를 잡고 끙끙대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욕지기가 섞인 울음을 쏟아냈다. 이까짓 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의 무용함에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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