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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온다.

겨울을 맞이하는 마음

by 윤비

몇 년 동안 칩거했던 탓에 겨울옷이 없다. 물론, 칩거하지 않았어도 입을 옷은 없었을 것이다. 질 좋은 기본 스웨터들은 관리만 잘하면 앞으로 10년은 더 입을 수지만, 안타깝게도 바지는 그럴 수가 없다. 바지는 질보다는 핏의 영역에 있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한 시즌만 지나도 자신이 저렇게 생긴 걸 입고 다녔다는 당혹스러움을 선사한다.

운이 좋으면 몇 년 동안 즐겨 입을 바지가 생기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 그 바지의 생명이 끝났음을 알았다. 온라인 쇼핑밖에 하지 않는 사람은 알 것이다. 본인의 체형에 어울리면서 과하지 않고 지금의 트렌드를 놓치지 않은 새로운 핏의 바지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도(나는 호들갑을 잘 떤다.) 같은 일임을.


밤마다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지금 가지고 있는 아이템과 어울리는 바지를 찾아 헤맸다. 몸의 곡선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적당한 루즈핏이되 밑단이 스트레이트로 떨어져야 하고 나의 발등을 덮을 정도의 기장이지만 바닥에 끌리지 않아야 하고 스판덱스가 없는 밀도 높은 소재면서 가격은 10만 원이 넘지 않는 것으로.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바지는 2달 만에 그만둔 회사에서 내가 담당했던 브랜드에서 디자인한 것이었고 나는 조금의 망설임 끝에 그것을 구매했다. 이틀 만에 도착한 바지는 내가 바라던 바를 모두 만족시켰다. 나는 그들이 고작 2 MM 차이로 나를 그토록 닦달했던 것이 떠올랐고 결국 그 닦달이 나로 하여금 이 바지를 구매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2 MM의 세상이 버거워서 자꾸만 대충 살고 싶어진다. 지금껏 해왔던 ‘애’라는 건 단지 그 버거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쓰는 ‘애’에 가까웠던 건 아니었을까. 아무리 애써도 내가 바라는 만족을 얻지 못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의 한 달이 지났고 이곳에서의 첫 번째 가을을 맞았다. 한 달이 생각보다 느리게 지나갔다고 느끼는 걸 보면 예전만큼 쉴 틈 없이 바쁘지 않았다는 뜻이고 폭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곡기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스트레스로부터는 벗어났다는 의미일 테다.


지금의 가을을 놓치기 싫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새로 산 연한 핑크 스웨터와 언제 산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퍼플 머플러가 원래부터 한 쌍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린다. 지금까지 사고 모았던 것들이 죄다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역시 취향이라는 건 쉽사리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앞으로도 쭉 연애 같은 건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며칠 전에 홧김에 산 책을 꺼내 읽었다.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에서도 혼자 있을 수가 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걷다 보니 유명하다는 단풍 명소에 다다렀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자 괜히 나왔다는 생각이 가셨다. 가보지 않으면 모른다.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스레 사진을 찍는다. 남겨진 사진에 마음이 아파 아무것도 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은 낙엽 더미에서 피어난 보랏빛 해국을 찍고 엉덩이를 치켜들고 먹이 사냥을 하는 오리를 찍고 낙엽이 떨어지는 나무 그루터기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고양이를 찍는다.

행복했고 아렸다. 행복해서 우는 건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것이 순도 100%짜리의 행복의 감정에서만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나는 결코 울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깜찍한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행복하면 눈물이 날 것 같지만 끝내 울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행복과 함께 밀려드는 슬픔이나 안도감, 외로움 같은 것들도 행복의 일부분이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이토록 가을이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버거운 순간만을 모면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고 있다. 무엇을 바라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렇게 2 MM 따위는 대충 넘어가고 싶은 불완전한 모양으로 그래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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