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불과 10년 전 영화나 드라마를 다시 보고 있을 뿐인데, 해당 영화나 드라마에서 설정하는 당시 사람들의 상식이 지금과 너무 다른 점을 발견할 때 말이다.
예를 들면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같은게 있다. 이 드라마는 삼십세 삼순이가 주인공인데, 시집 못 간 노처녀로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고졸이지만 프랑스 명문 제과제빵 학교를 나와 제과제빵 기능사 자격증을 따서 고급 호텔에 취직할 정도로 능력이 좋은 캐릭터다. 하지만 '결혼을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자존감은 언제나 바닥을 친다. 거기다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설정도 가미되는데, 김선아 배우가 연기를 해서 그런가 시청자에겐 별로 설득력이 없다.
2004년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 같은 걸 보더라도 그렇다. 여자 주인공 하지원이 소지섭과 조인성이라는 두 남자 배우와 삼각관계를 이루는 스토리인데, 조인성 캐릭터가 좀 괄괄하고 막나가는 재벌 2세 역할이다. 사랑한다는 명목 하에 하지원을 거의 납치하고 폭행 직전까지 가고, 자기 죽어버리겠다 협박하고 하여튼 별의별 방식으로 들들 볶아댄다.
그 때 난 초등학생 정도였어서 2000년대에 연애했던 성인들은 정말 이런 방식으로 연애를 한건가 궁금할 정도다. 분명한 건, 그 당시 드라마 설정이 오늘날 그대로 방영된다면 틀림없이 큰 뭇매를 맞을 것이다. 여성 만큼이나 남성들도 대단히 불쾌할거라 생각한다. 당시 로맨스 드라마 남자 주인공 직업은 99%가 재벌 2세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사회적인 태도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문화적인 안테나가 이러한 움직임을 향해 언제나 열려 있지 않으면 이미 죽은 글을 쓰게 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폴링 인 러브>에서 그나마 관중들의 하품을 막아주는 단 하나의 장치는 사랑에 빠진 남녀가 각각 이미 기혼자라는 사실 하나뿐이다. 관객석에 앉아 있다 보면 관객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 거의 들리는 것 같다. "그래서 네 문제가 도대체 뭐야? 목석 같은 자와 결혼을 했다. 그러면 차버리면 될 거 아냐. 이혼이라는 단어 혹시 못 들어봤나?'
그러나 1950년대에는 혼외의 연애는 아주 고통스러운 배신으로 그려졌다. <만날 때는 타인>, <밀회>를 비롯한 많은 날카로운 영화들이 혼외 정사에 대한 사회의 적대감으로부터 그들의 동력을 취했다. 그러나 1980년대의 태도는 이와 확연히 달라져서, 인생은 짧고 사랑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니 이미 다른 사람들과 결혼한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라는 식으로 변했다.
- 로버트 맥키,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이렇게 사람들의 사회적인 태도가 계속 변화한다고 해도, 작가는 자신이 평생 매달려온 주제와 아이디어에 인생을 다 바친다.
예를 들어 헤밍웨이의 소설은 모두 '죽음'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과 우울증, 건강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을 직접 경험한 후 깊은 트라우마가 새겨졌다.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작품에선 전쟁 속 죽음을 대면하는 인간의 취약함을 그려냈다. 삶이 근본적으로 덧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인과 바다>에선 인간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패배와 죽음을 담았다. 권총으로 자기 자신을 쏴버리기 직전까지, 헤밍웨이는 살아있는 동안 죽음에 대해 가장 많은 질문을 던진 작가였다.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는 소외, 불안,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반복적으로 다뤘다. 그의 작품들은 종종 인간이 거대한 사회적 구조나 권력에 의해 무력해지고 소외되는 상황을 묘사한다. 대표작 <변신>, <심판> 등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조리한 현실에 의해 억압되고 소외감을 느끼며 고립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 셰익스피어 처럼 '관객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음'이라는 태도로 극을 만든 작가도 있다. 그는 사랑, 권력과 야망, 배신과 복수, 인간의 나약함과 운명, 정체성과 변화, 생명과 죽음, 정치와 사회 질서 등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그것도 아주 높은 완성도로. 무명 시절도 없이 당대 최고의 성공을 거둔 작가다.
이렇듯 세상과 사람들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작가는 자기 일생을 다 바쳐서라도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진실되면 진실될수록, 시간의 때를 타지 않는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누가 '옛 사람들 생각 참 고리타분하군'이라며 책을 덮어버릴 수 있겠는가. 어느날 갑자기 괴물로 변해 가족들에게 멸시 당하고, 사과를 맞고 죽어버린 존재에 대해 소름끼칠 정도로 공감하고 감정이 이입될 뿐이다.
그래서 진짜 작가들에겐 트렌드라던지, 요즘 애들 생각 같은 게 통할 리 없다. 그런 건 그냥 이 사회 위를 둥둥 떠다니는 어떤 물질 같은 거다. 중요한 것은 지구 내핵 같은 곳에 존재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카프카를 읽고, 조지 오웰과 사뮤엘 베케트를 들춰본다. 100년이 지났어도 오늘 옆에서 하는 말처럼 생생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아니더라도 그런 삶을 살겠다 마음을 먹으면 된다. 내 안에서 메아리 치는 소리가 무엇인지, 죽어라 집착되는 대상이 무엇인지 계속 들여다보면 나오지 않겠나.
개인적으로 사람이 상처가 많고 트라우마가 심할수록 내면의 울림이 크고 깊다는 걸 자주 목격하는 바이다. 그러니 남들보다 너무 아픈 생을 살았다고 좌절하지 말아라. 세상은 당신에게 벌을 주려는 게 아니라 당신의 의지를 테스트하는 중이다. 지지 말고 굳세게 일어서면 그만이다. 또한 많이 아픈 사람들은 글을 쓰길 추천한다. 당신이 새로운 헤밍웨이로 인류에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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