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갔다가 시차에 처참히 무너졌다. 봐야 할 것들은 다 보았으나 파리와의 첫 번째 만남은 좋지 않게 끝났다. 맙소사. 꿈의 도시 파리에 가서 몸에 지배를 당하다니. 그래서 두 번째 방문엔 철저히 준비했다. 가장 신경 쓴 것은 숙소! 파리가 처음일 땐 가장 저렴한 숙소를 예약하는 바람에 정말 애매한 위치에서 왔다 갔다 했었다. 그래서 두 번째 방문엔 저렴하면서도 내가 돌아다니기 편한 장소에 숙소를 구했다. 그땐 에어비앤비가 없어서 스페인 업체를 통해서 에펠탑 5분 거리에 집을 구했었는데 밥도 해 먹을 수 있고 상점도 바로 옆에 있어서 최고였다. 숙소가 편해서였을까. 이번엔 시차 적응에 완벽히 성공해서 돌아다녔다. 그래서 바로 달려간 곳이 있으니 기메 동양박물관이었다. 지난번 방문에서 재밌는 문화재를 많이 만났기에 또 한 번 만남을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화재는 부처님 탄생을 그린 작품이었다. 부처님은 룸비니동산에서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 있었다. 이번엔 또 어떤 문화재가 나를 기다릴까 가봤는데 아쉽게도 재치 넘치는 작품은 만나지 못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용을 잡은 동자상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수장고로 들어가 버렸다. 혹시나 천수관음상도 들어가 버렸으면 어쩌지 싶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전시돼 있었다.
사찰에 가면 손이 아주 많은 보살님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 아니, 왜 이렇게 손이 많으시지? 하고 쳐다보기 시작하면 더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눈도 많으시기 때문이다. 어라? 눈이 왜 이리 많으시지? 하고 보다 보면 얼굴이 많은 보살님도 계시다. 오오~ 대혼돈이 온다. 아니 저분은 누구시길래 손도 많고 눈도 많으신 걸까?
저분은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25 존의 보살을 솟아나게 했는데 정수리 위에 11개의 얼굴을, 손은 40개를, 손바닥에는 눈이 하나씩 있도록 했다. 25 존의 보살은 각각 40개의 손과 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합치면 천 개의 손, 천 개의 눈이 된다. 이를 천수천안(千手千眼)이라고 하는데 바로 기메박물관에 있는 천수관음상이 이것을 구현한 것이다.
너무 바쁠 땐 몸이 열 개 정도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 명은 공부하고 한 명은 청소하고 한 명은 돈 벌고 오~ 아홉 명의 내가 각각 일하고 나는 잠이나 자면 좋겠다~하는 엉뚱한 생각 말이다. 나는 게으름을 구현하기 위해 몸이 여러 개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관세음보살은 아니다. 보살이 손과 눈이 많은 이유는 구고구난(救苦救難)을 위함이다. 고통과 재난에 빠진 중생을 구하기 위해 손과 눈이 많으시다. 게으름뱅이 나와는 정말 다른 이유다.
삼국유사에 이에 대한 향가가 나온다. “무릎을 곧게 하고 두 손바닥을 모아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비옵나이다. 천 손의 천 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덮으사 둘 없는 저울시다. 하나를 그윽이 고치기 바라나이다. 아아, 놓아주신, 자비(慈悲)야말로 클 것이외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이 향가는 경주 한기리에 사는 희명이라는 여인이 자신의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눈이 멀자 분황사에 있는 관세음보살 벽화 앞에서 불렀다고 전해진다. 역시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은 자신의 눈을 하나 내주어서 아이가 앞을 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이렇게 멋진 관세음보살이 유리관에 갇혀 계시는 것이 슬픈 걸까. 한국 사람들은 이 보살상을 한국으로 가지고 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도 탐진치의 삼독. 보살님이 기메에 계신 이유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저 예뻐서 가져오려는 욕심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을 때 보살님이 한국으로 오지 않으실까.
그리고, 이건 정말 하고 싶은 말인데. 예전보다 지금의 기술이 훨씬 더 좋다. 옛 것에 집착하지말고 지금의 기술로 더 예쁘고 멋있는 천수보살을 만들면 된다. 그런 사람이 아쉽게도 나타나지 않지만 말이다.
천수천안을 구현한 곳 중에 보자마자 ‘헉’하고 소리쳤던 곳이 있다. 바로 교토에 있는 산쥬산겐도(蓮華王院 三十三間堂)다. 여기엔 합장하신 관세음보살님이 천 분이나 계신다. 그러니 이번 생애에 고난과 재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간절히 빌어야 할 때가 생기면 한 번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서 천 개의 손 중에 하나를 빌려주실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