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체성 6 )
셋째 아이인 딸아이가 영어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만 세 살이 되어가는 나이인데 '이거, 저거' 정도만 한국말로 하고 한국말을 알아는 듣지만 영어로 짧은 문장을 만들어 대답하기 시작하는데 셋째 아이만은 꼭 한국말을 시켜야 되겠다는 내 간절한 바람은 아이들이 말을, 정확하게는 영어를 시작할 때쯤 해서 조금의 시련으로 다가온다.
캐나다에서 살면서 내 아이들에게 한글말 공부시키기가 힘들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있지만 첫 번째로는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 남편은 캐나다 사람.
아이들이 한국말을 따로 들을 곳이라곤 유튜브뿐인데 셋째 아이가 한국 동요를 몇 번, 만화를 몇 번 보는 것으로 언어 실력이 늘리 없고 가까운 한국 가족이 있어 아이들을 봐준다거나 만나서 같이 노는 일도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유치원, 학교를 시작하면 (그것도 우리 아이들은 불어 학교를 다니고 있어 더더욱) 아쉽게도 한글의 끈을 조금씩 놓고 만다.
게다가 내가 사는 곳은 한국인들이 그리 없는 작은 시골이고 몇 명 있는 친구들의 자식들도 다 나와 같은 처지라 결국엔 아이들이 다 이곳 언어에 익숙해 한국말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로 성장한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데 한국인의 수가 많이 없는 내가 사는 이 캐나다의 시골동네엔 한글 언어 레슨, 한글학교 같은 것도 없고, 내 아이들에게는 손주 손녀가 이쁘고 그리워 매일 전화해 한국말로 안 되는 대화라도 나누려고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어 아이들은 또 한국말을 들을 리 없고, 무엇보다 엄마라는 나란 인간도 집에서 한글로 아이들에게 아무리 이야기를 해 봐도 응답은 올곳이 영어인지라 캐나다 생활 18년째, 이젠 한글 단어보다 영어 단어가 먼저 머릿속에서 스프링처럼 무반응으로 튀어나오는 걸 보니 이젠 한글을 배울 사람은 애들보다 내가 먼저가 아닌가 싶다.
영어로도 많은 표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음식을 먹고 시원하다라고 하는 우리의 표현 방식, 마음이 허하다라고 한다든지의 '어떤 것에 대한 표현'을 구사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적극적이고 구체적이고 알맞기를 넘어서 너무 적합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표현할 길이 있는 한글의 매력은 영어가 가까워지고 편안해질수록 새삼스럽게 자랑스럽다.
그래서 언젠간 내 이야기를 아이들이 스스로 읽어 내려갈 수 있다면 그건 또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그나저나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허한데 그럴 땐 빵 조각, 버터, 아보카도, 베이글, 치즈는 도저히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배는 고프고 아침부터 라면을 끓여 먹기엔 이젠 인스턴트를 아무 때나 먹으면 탈이 나게 된 나이인지, 불량식품을 향한 내 몸의 순수한 저항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침부터 날 배탈이 겁나 냉장고를 뒤적거리다 냉장고 뒤켠으로 내 보내진 작은 용기 속 조금 남은 김치를 발견하곤 갑자기 머릿속에 그제 조금 아이들 튀겨주고 남은 냉장고 다른 한편 스팸과 두부가 생각이 나 김치찌개를 끓이기로 했다.
그나저나 스팸과 김치찌개.
난가?
ㅋ
부모가 되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는 어릴 적 단 한 번도 부모가 된 나를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여자아이들이 난 우리 엄마처럼 뭐가 되고 싶어, 혹은 나도 커서 엄마가 될 거야,라는 바람들을 들을 때마다 난 글을 엄청나게 잘 써서 싱글로 살아도 전혀 문제없는 커리어 우먼, 뭐 이런 게 되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삶은 늘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던져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가 된 것, 부모가 된 것은 동정받기는 죽어도 싫던 내가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깊게 가지지 못했던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 남을 위하는 마음이 결코 나에게 그르지 않다는, 오히려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나에게 또한 가장 유익한 이해, 인생의 공부가 아닌가 싶다.
할머니가 운영하시던 구내식당에서 지겹도록 먹은 김치찌개. 스팸이나 캔 참치가 들어간 적은 많이 없었지만 할머니는 명절 때 남은 전을 넘어 짜글이 김치찌개도 끓여 주셨고 그날 시장에서 만들어 가져 온 생두부를 큼지막하게 잘라 뚝배기 가득 채워 쪽파만 숭숭 올려 먹어도 맛있었더랬다.
캐나다에 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이들을 낳고 부모가 되고, 내 아이들을 위한 음식을 하게 되면서 가공햄이 들어가지 않았어도 충분히 그리고 무엇보다 몸에 나쁜 거 하나 없이 정직한 재료들로 정성껏 만들어 낸 음식들이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고부턴, 그리고 또한 내 몸 자체가 외국에 살면서 외국 음식에 충분히 길들여져 굳이 한국음식을 찾지 않아도 될 거란 생각을 했던 예전과 달리 기름지고 제조, 공정, 보관과정이 긴 음식들이 많은 서구 음식에 배탈로 반응하는 내 영락없는 한국인몸은 '한식'에 대한 어떤 믿음, 같은 것으로 변하면서 종종 할머니에게 음식을 조금 배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후회를 하곤 한다.
조금 맛이 간 신 김치를 올리브유에 볶다 간장 조금, 매실청 조금, 고춧가루 아주 조금, 설탕 반 반 스푼을 넣고 쌀 뜬 물이나 육수를 뚝배기 반 정도 부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스팸 조금 두부 조금 넣어 바글바글 끓을 때 후추 조금 툭툭 털어 넣어 끓이는 김치찌개에 인스턴트 팟에 15분이면 완성되는 갓 진 쌀 밥을 한 그릇 먹었다.
다른 반찬도 없이 김치찌개에 쌀 밥.
얹힌 속이 밑으로 쑤욱 떨어지는 시원한 맛.
난가?
아이들이 김치찌개를 먹고 “어휴, 시원해”라는 말을 하는 것을 상상해 본다.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