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정말 춥다.
동장군(冬將軍)이라는 말의 기세가 대단하다.
코끝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날카롭다.
세상은 어수선하게 돌아가도, 계절은 원래의 순리대로 흐른다.
자연은 인간 세상 시끌벅적한 일들이 지나면 다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거 같다.
무던한 시선이 때론 안정감을 준다.
'변해야겠다'
라고 마음을 먹은 24년 끝자락부터 나의 머릿속은 매우 복잡해졌다.
원래도 생각이 많은 스타일이긴 했는데,
이제 그 생각들을 현실 세계에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에 다다르니
시간의 절박함을 새삼 느낀다.
공부에, 다 때가 있다.
라고 말한 학창시절 샘들의 한탄이 맴돈다.
맞는 말이다.
확실히 배움이 몸에 쏙쏙 잘 흡수되는 신체적 학습 나이의 허용 뿐만 아니라
밥먹고 하는 일이 '공부' 말곤 없었던 학생 때의 주변 환경 또한
그 시절 허용된 유일한 자비였음을
마흔이 넘은 나는 절실히 깨닫는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야만 나는 자투리 시간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그것도 금방 까먹을 까봐
책상 주변에 포스트 잇 두 서너개를 붙여둔다.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후다닥 집으로 달려와
아이들 밥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살핀다.
여유가 없는 엄마(나)는 별거 아닌 일에도
신경질을 내는 횟수가 늘었다.
문제집을 푸는 아이 옆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몇 줄을 끄적인다.
아이의 질문은 당연한 것인데
돌아오는 대답이 영 딱딱하다.
미안한 마음이다.
감정과 생각이 부글부글 끓다가 시계를 보면 한 아홉시 반쯤이다.
큰 아이가 자러 방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콩나물을 양쪽 귀에 끼운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아이들이 각자의 일을 하는 순간이 주어지면서 나는 단순 반복의
살림을 할 때면 언제나 콩나물을 찾는다.
처음에는 아이들은 모르겠지? 싶었는데 몇 번 콩나물 한 쪽씩을 잃어버리면
잽싸게 찾아주는 건 두 녀석들이다.
" 엄마, 콩나물!! 여기 있어요."
고사리 손에 올려진 에어팟을 보는 나의 표정은 머쓱하다.
밤 10시가 되기 전에 콩나물을 양쪽에 끼고 산책을 나간다. 추워서 불편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목숨을 걸고 산책을 나가는 기분이다. 비가 와도 때때로 우산을 들고 나간다. 단 10분이라도 걷는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돌아가는 머리속을 무음으로 세팅한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물론, 그럴 일은 불가능하다.
가벼운 농담, 세상 돌아가는 아주 먼 세상 같은 이야기들을 소소하게 듣는다.
피식피식 웃기도 한다.
밤에 나처럼 산책하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그들도 침묵 속에서 안정을 찾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각자의 공간을 지켜주면서 제 갈길을 간다.
걷다보면, 불현듯 얽혔던 생각들이 풀리기도 하고, 때로는 참신한 뭔가가 떠오른다.
예를 들자면, 이번 주 브런치에는 이런 주제로 써볼까? 하는 것들 말이다.
다리가 아프다 싶어서 시간을 확인해보면, 1시간을 걸을 때도 있었다.
요즘은 너무 추워서 20분 정도가 최장 시간이었다.
매서운 칼바람에 '그대로의 나'는 그리 오래 버티기가 어렵다.
혼자만의 산책 시간이 끝나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안의 온기와 불꺼진 거실. 그리고 색색거리는 아이들의 잠든 숨소리와 얼굴을 확인한다.
나는 다시 '일상의 나'로 돌아온다.
산책이란 대개 한가롭고 여유 있는 상황에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때때로 고통이나 고립감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되는 수도 있다. 그럴 때 산책은 일종의 마취제나 안정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집이라는 공간에 고립되어 있을 때, 사람은 고통에 더욱 취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바깥으로 나간다는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진통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마음이 고독과 소외감으로 저조할 때엔 한적한 오솔길을 걷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를 택해 기분전환을 꾀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산책이란 단순하지 않아서 때론 남들의 밝은 모습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때에 따라 적절히, 무엇보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는 곳은 피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세상엔 길은 많고. 모든 길은 저마다의 특색이 있다. 여행지에서의 산책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 근처를 거닐게 딘다. 그리고 그날그날 산책의 용도에 따라 코스 또한 다양하게 선택된다. 운동을 겸해 약간 빠르게 걸을 수 있는 길, 생각할 것이 있을 때 찾는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길.....
길은 풍경이고 풍경은 우리에게 생각과 느낌을 준다. 길을 걸으며 흐르는 풍경을 목도하는 것이 바로 산책이다.
이석원 <보통의 존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