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밤에 대한 견해
나는 립밤을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수시로 바른다. 주머니 속에 항상 넣어둔다. 걷다가도 만지작 거린다. 입술이 말랐다 싶을 때 립밤을 바르면 갈증에 물을 마시는 기분이다. 화장대 위는 물론이고, 가방 속이나 책상 위, 사무실 서랍 안 손 닿는 곳에 모두 립밤이 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
립밤을 두고 외출을 했다는 걸 깨달으면, 곧바로 뇌정지가 온다. 아, 어떡하지. 눈 앞에 대화하던 상대의 말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주변의 소음이 차단된다.
' 근처에 립밤 파는 데가 있나.'
' 편의점이 있으려나.'
' 립밤 좀 빌려달라고 할까.'
기분 탓일까. 그럴 때면 입술이 평소보다 더 메마르고 당기는 느낌이다. 대화 중에 갑자기 편의점으로 뛰어갈 수도 없고 좌불안석이 된다. 아주 친한 사이면 나의 립밤 강박증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상대가 립밤이 있으면 다행인데, 의외로 무색 립밤을 찾기는 어렵다. 색이 약간 가미된 립밤이거나 아니면 들고 다니지 않는 경우도 수두룩이기 때문이다. 색이 가미된 제품은 촉촉함이 덜하다.
무색 립밤이라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K 화장품의 립밤을 애용했다. 손가락 길이만큼의 튜브 형태로 무향, 크렌베리, 배, 민트향이 있는데 그중에서 나는 민트향을 정말 사랑한다. 촉촉하게 발리면서도 싸하게 퍼지는 치약향 때문이다. 바르면 텁텁한 기분까지 상쾌해진다. 하나 가격이 만 칠천원인데, 그것을 바로 사려면 백화점에 가야한다. 오프라인으로도 살 수 있긴 한데 백화점에 갈 때면 꼭 그 립밤을 사고 온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갈 때마다 한개씩 꼭 품고 오고, 몇 달 만에 가는 경우에는 서 너개를 산다.
" 어머, 안녕하세요. 어쩌죠. 오늘 민트가 없는데..."
점원도 나의 얼굴을 알 정도면, 내가 오랫동안 한 곳을 가긴 갔나보다. 겸연쩍은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이지만, K 점원과 나는 친밀히 말을 주고 받는다. 이 세상에 민트 립밤에 대한 나의 무한 애정을 가장 호의적으로 봐주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곧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했다.
" 그런데, 고객님. 25년부터는 민트 립밤이 단종되어 나오지 않아요."
네??????
품절이 자주 되서 몇 달씩 기다린 적은 있었어도 단종이라니!!!
오 마이 갓....
머리가 새하얘졌다. 내 얼굴에 드러난 당혹감을 읽었는지 점원의 얼굴도 같이 일그러졌다. 쯧쯧, 안타까움이 읽혔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나같은 반응을 보인 손님이 그나마 있었던 모양이었다.
" 이 제품만 찾는 고객님이 몇 분 더 계시긴 해요..."
그래도 K회사의 민트립밤 단종 결정은 바뀌지 않나보다. 이유가 뭘까? 꾸준히 잘 팔리고 나처럼 이 립밤에 목매달고 사는 이도 있는데...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왜 내게서 민트 립밤을 빼앗아 가는지 심각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민트 립밤에 대한 나의 집착은 생산자의 변심으로 허무하게 끝을 내야했다. 아직도 심적으로 받아들이긴 힘들지만 뭐, 별수 있나. 변화를 받아들일 수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마지막 제품이 입고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립밤 일곱 개를 사서 온 게 다였다.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면, 화장품 본사 홈페이지에 글을 번역해 올릴 수도 있겠다.
고작, 립밤 하나 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 K사의 민트립밤은 완벽한 존재였다. 단지 피부 보습 제공이라는 본연의 기능 뿐만 아니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그 소소한 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점점 집착하게 되었다. 굳이 말한다면 그것을 '취향'이라고 부를 순 있겠다.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인 취향이라는 말은, 실상 소소한 것에 얽매이고 마는 끈적거림과 닮았다. 어쨌든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다시 새로운 립밤을 하루라도 빨리 찾는 것이다. K사의 민트 립밤을 대체할 수 있는. 제발 마음에 쏙 드는 녀석을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