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혼자 있고 싶어하면서도 고독을 두려워하는 특이종
그리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는 일곱살 이전은 거의 암흑이다.
그나마 드물게 기억에 남은 장면은 명절 전후다. 설날, 추석...
예닐곱 살이었지만, 나는 그런 날들에 대해 매우 복잡한 감정을 가졌었다.
명절 당일 오전에는 구포에 있는 친할아버지 댁에 갔었고, 당일 저녁 시간에는 남구 쪽에 있는 큰 이모댁으로 향했다. 친할아버지 댁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아주 작은 아파트에 사셨다. 방과 방 사이를 오가는 문턱이 아주 높았다. 건너방 텔레비젼에서는 씨름 중계방송이 흘러 나왔고 나는 전기장판 아래에 엎드려 있었던 거 같다. 엄마는 늘 기분이 좋지 않았고, 아빠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 고모가 있었다고 하는데, 한 번정도 봤을까? 목소리가 허스키했던 기억만 난다. 구포는 내게 재미없는 곳이었다.
차가 없어서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탔다. 길을 가던 중에 말다툼을 하던 엄마와 아빠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목소리가 커진 엄마 앞으로 동전 폭탄이 쏟아졌다. 몇 걸음 앞서 걸어가던 아빠가 화를 내며 동전을 바닥에 내던졌던 것이다. 지하철 매끈한 갈색 바닥 위에 백원 짜리 동전들이 반짝거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긋거렸겠지만, 나는 엄마 입을 가린다고 바빴다. 남들이 보든 말든, 아빠가 엄마를 때릴까봐 나는 너무 무서웠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든 말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마, 도움이 필요했다면 나는 길가는 아무나 붙잡고 도와달라고 했을 것이다.
저녁 시간 즈음에 큰 이모가 사는 5층 짜리 아파트에 갔다. 엄마는 7남매의 막내였다. 그래도 명절에 모이는 집은 큰이모, 작은이모, 그리고 막내 삼촌과 우리 가족 뿐이었다. 4층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면 음식 냄새와 훈기가 돌았다. 구포와는 달랐다. 사촌들도 있었고, 시끌벅적 인사말이 오갔다.
"아직 안 왔네."
막내 삼촌이 집 안을 죽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 작은 이모네가 오지 않았다는 뜻이었을 게다. 큰 이모 집이었지만, 그 모임의 주인공은 작은 이모네였다. 은행을 다니는 이모부가 은행장까지 올랐다. 그리고 이모네 아이들은 모두 공부를 아주 잘 했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했고, 훗날 명문대에 갔고 의사도 되었다. 엄마가 자주 작은 이모네 사촌언니와 나를 비교했었다. 언니를 가지고 싶었던 나는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묘하게 신경이 쓰이면서도 사촌언니와 친하게 지내는 그 시간은 참 좋았었다.
전과 고기, 탕국 그리고 갖가지 반찬들이 그득했던 저녁을 먹고 나면 어른끼리의 시간, 아이들끼리의 시간이 나뉘어졌다. 어른들은 큰 방에서 술을 좀 마셨고 아이들은 작은 방에서 텔레비젼을 보았다. 엄마와 이모들은 부엌과 거실 귀퉁이에서 앉아 수다를 떨었다. 명절의 따뜻함이라고 하면, 딱 그 순간이었던 거 같다. 나에게는 그 때의 잔상과 음식 냄새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렇게 몇 번의 명절을 보내고 난 후 열 살 즈음부터는 구포에 더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즈음에는 큰 이모집에서 모이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알코올 중독으로 큰이모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명절 모임을 서 너번 더 했다.
누군가 나서서 " 이제 명절 모임 그만하지." 라고 말을 한 것 같진 않은데 명절 모임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선물 세트를 서로의 집에 주고 받는 것으로 절차가 간소해졌다. 딱히 차례를 지내는 집도 아니라 그동안 다 같이 모여서 밥먹고 헤어지는 게 다였다. 그런데 그마저도 사라지니 내게 명절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명절에 갈 곳이 있고, 왁자지껄함 한 가운데 앉아 있다는 소속감은 이제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 가족을 다른 가족과 비교하며 느꼈던 가난과 이유를 알 수 없는 면구함, 그리고 내 부모를 자식으로써 불쌍히 바라보게 되는 측은지심과도 안녕이었다. 얻은 게 있으면 잃은 게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사는 게 바빠졌다. 명절이면 엄마랑 둘이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맛있는 걸 먹으러 가거나 엄마에게 옷을 사드리기도 했다. 우습지만 과일 세트를 내가 우리집에 보내기도 했다. 명절은 내게 그 해 거쳐야 할 큰 과제였다. 명절연휴를 보낸 게 아니라 명절연휴를 이겨내야만 했다. 시간의 공백을 꾸역꾸역 채워내야만 할 것 같았다.
결혼을 했고, 아이도 둘을 낳았다. 남편과 내가 모두 외동이라 우리 아이들에게는 사촌이 없다. 사촌의 사촌이라고 찾아가 만나게 해주는 것도 번거로웠다. 형제자매에 대해 환상을 가진 우리 부부는 그래서 아이를 둘은 낳아야 한다고 나름 결정지었다.
제사도 없고 차례도 없지만
나는 이번 설날 연휴에 남편과 함께 잡채도 만들고, 삼색전도 해볼거다. 집 안을 지글지글 기름 냄새로 채우고 싶다. 뒹굴거리면서 영화도 보고. 한적해진 도로를 좀 달려서 경치 좋은 곳에서 커피도 한 잔 하고 올 거다. 교보 문고에 가서 책 구경도 좀 하고. 내가 좋아하는 편안하고 안락한 것들로 연휴를 소소하게 채워나갈거다. 이제부터는 견디지 말고 즐겨보리라. 이 명절이라는 시간을.
당신의 명절도, 당신만의 방식으로
따뜻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