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네번째 이야기
늘 표정을 숨기고, 의도를 감추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배워왔다. 우성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익숙치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우성의 얼굴에 드러난 눈빛은 누가 보아도 설레고 있다.
‘ 찾았다. 김복자.’
- 꼬르르륵
왜 하필이면 이 퍼펙트가이 앞에서 생리현상이 솔직해지는지 복자도 당황스럽기만 하다.
“ 알고! 크 ”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배를 가리면서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 여기 스시 도시락 맛있는 곳 있는데 같이 안 갈래요? 우리, 초면도 아니니깐 이상하게 들리진 않죠? 저도 점심 전이라...”
단정한 이목구비 위로 선한 웃음이 번졌다. 우성의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하다.
“ 진짜요. 점심시간 꽤 지났는데... 아직까지 안 드셨다고요? ”
“ 아... 그러게요... 근데 부산엔 어쩐 일로?”
급히 화제를 바꾸며 우성이 가는 방향을 넌지시 복자쪽으로 알린다. 스시집 앞에서 우성의 폰이 울리고, 복자를 먼저 들어가게 한 후에 돌아서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 전무님. 이 실장입니다. 이제 30분 뒤에 공항으로 출발하셔야 하는데... 왜 거기로 들어가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아, 네... ”
뒷말을 얼버무리며 우성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러다 대형 밍크 선인장 화분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이 실장을 발견했다. 이 실장은 눈으로 이게 무슨 일이냐고 다시 한번 묻고 있었다. 분명 한 시간 전에 백화점 임원들과 점심 식사를 마친 우성이 다시 같은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아서다.
“ 네 그럼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우성은 가게 안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복자와 눈을 마주치곤 별일 아니라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니 뭘 알고, 뭘 수고해? 황당하기만 한 이 실장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아 정말.... 요즘 진짜 이상하시네. 왜 저러시나.”
꽤 널찍한 유리창으로 센텀 시티 전경이 선명하게 내려다보인다. 바다가 보이는 건 아니지만, 부산의 도시 풍경은 또 다른 볼 재미가 있었다. 창밖을 보던 중에 제 얼굴에 달라붙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눈이 딱 마주친 상대가 먼저 대화를 열어줬다.
“ 부산, 서울이랑은 또 다르죠?”
“ 어렸을 땐 해운대 몇 번 놀러오고. 그리고 일로 잠깐 왔다가 가고 그랬는데.. 오늘은 사뭇 느낌이 다르네요.”
각 잡힌 슈트차림에 언제나 완벽하게 모든 게 셋팅된 최고급 삶만 살았을 것 같은 이 남자가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그래서 처음 봤을 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지만. 복자는 왠지 모르게 그가 거리감이 들었다. 불편하고 조금은 어색하다. 실수할까 봐 긴장감이 들기도 하고.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 복자-” 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북 콘서트 행사 관계자인가 싶어서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무슨 일 생겼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네~” 라고 답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정말, 너무나 신속하고 정확했다. 무릎을 탁치면 발이 틱하고 올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가게 안의 종업원, 듬성듬성 앉아 있던 다른 테이블 손님들, 그리고 눈앞의 퍼펙트가이까지 일제히 우뚝 솟아난 복자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상황을 감지한 종업원이 서빙 그릇을 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주문을 읊었다.
“복어랑 장어 세트.... 복.자 ㅇ....”
종업원과 복자의 눈빛이 중간에서 어색하게 부딪치고 고개를 끄덕이다 제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복자의 얼굴빛이 새빨간 참치살이다.
“크크...크”
무슨 소린가? 앞을 쳐다보니 우성 눈물까지 흘리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있다. 어깨까지 파르르 떨면서 말이다.
아, 이거 뭐지.
복자는 고개를 떨구고 다시 쳐다보고, 다시 고개 떨구기를 반복했다.
“ 아~ 거짓말한 것처럼 돼서 이상한데, 처음 봤을 때 말한 이름, 제 이름 아니었어요. 어쨌든. 이제 그만 웃어요.”
민망해서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복자는 한 손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면서 말한다. 그런데 앞에 남자가 영 눈치가 없다. 꺼이꺼이 웃는데 손으로 눈가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렇게 웃긴가.
“ 아~ 정말 고만 웃으라니깐요. 진짜 사람 무안하게 하네.”
복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완벽한 갑옷을 입은 저 먼 나라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개구쟁이처럼 웃는 모습을 보니깐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에서 더 빛이 난다. 아주, 조금은 그가 편해지려고 한다. 근데, 너무 웃으니까 슬슬 기분이 언짢아지려 한다.
복자가 화를 한번 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기다리던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꿀꺽- 반지르르한 윤기가 잠시 잊고 있었던 배고픔을 확 깨닫게 해준다. 저도 모르게 복자의 콧구멍이 양옆으로 벌렁-하고, 흥분한 젓가락질이 노란 계란 초밥을 향해 전투적으로 움직였다.
입 안에 퍼지는 달달한 맛과 폭신한 촉감...
맛있는 거 먹으면서 감탄이 안 나오는 건 반칙이야. 복자, 저절로 눈을 감고 “으흠~”하고 맛을 음미하다가 바로 눈앞에 자신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우성과 마주친다.
아, 맞다! 이 사람이 있었지~
좀 우아하게 먹어야지~ 김복자.
생선초밥인데 돼지국밥처럼 후루룩 하는 느낌을 줘선 안 되지 않겠니? 스스로 단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최대한 우아하게 젓가락에 광어초밥 간장에 쿡 찍어서 입안에 앙 하고 넣었다.
오물오물하게 씹는 복자의 입술,
가만히 바라보다 우성이 입을 연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 복.자.씨,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죠?”
입 안에 막 들어온 광어초밥의 매끈한 살결을 느낀 복자, 무슨 소린가? 하는 눈빛을 우성에게 보낸다. 앗!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다. 혓바닥 안쪽 돌기에 동글동글 뭉쳐진 와사비 군단의 느낌이 살짝 닿았다.
우성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복자 쪽으로 스윽 몸을 기울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부드럽지만, 어딘가 묘하게 섹시하다는 느낌이 느껴지는 어투로 말했다.
“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서요. 나 속 태우려고. 자꾸 그 쪽 궁금하게 만들려고. 그런 거면 성공한 거 같은데.”
고백 아닌 고백 같은 말을 툭 던지고, 내 마음은 이런데 너는 어때? 라는 눈빛으로 복자를 당당히 바라보는 우성.
아~ 뭐야. 이 남자 왜 이렇게 당당하고
왜 이렇게 멋진 거야.
부드러우면서 거칠고,
거기다가 이렇게 맵기까지....
으-----악!!!!
우성의 갑작스런 발언에 정신이 아찔하던 복자의 입 안에 와사비 폭탄이 투하되었다. 폭탄은 자비 없이 그녀의 입안을 초토화시켰다.
코가 뻥, 눈이 뻥
“ 아- 아-아-”
아... 이건 뭐 콧구멍이 세 개가 되는 기분이었다.
화보를 뚫고 나온 남자 앞에서 제대로 된 단어도 내뱉지 못하고 옹알이를 해대는 복자, 전혀 유혹적이지 않을 것 같은 반쯤 감긴 눈으로 눈물을 흘려대며 콧구멍을 자동으로 벌렁거리는 불쌍한 복자, 이 망할 놈의 와사비...
“ 복자씨. 괜찮아요?”
우성은 복자가 걱정이 되면서도 동시에 참을 수 없이 웃기고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한 손으로는 휴지를 뽑아 복자의 눈물을 닦아주면서도 억지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매워서 죽을 것 같은 여자와
웃겨서 죽을 것 같은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