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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한 Feb 21. 2021

세탁기 고쳐봅시다

얼마 전부터 집 세탁기가 탈수 모드를 할 때마다 탱크 지나가는 소리를 냅니다. 섀시를 닫아 놓은 상태에서도 굉음이 방 안으로 들릴 정도니 동네 민폐가 따로 없습니다. 몇 번 정도 빨래방 신세를 지다가 안 되겠다 싶어 사설 A/S 정비 업체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이리저리 알아보니 수많은 사설 정비 업체가 검색됐고 보통 15~20만 원 정도면 고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전화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내가 한 번 고쳐 볼까?’


가구를 하나 사도 조립에 실패할 때가 종종 있는데 하물며 세탁기라는 ‘전문’ 영역을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한 번 시도 해보기로 했습니다.


곧장 유튜브를 켜고 같은 증상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영상을 검색했습니다. 수 십 가지 영상이 검색됐고 5분짜리 영상 하나를 골라 필요한 물품이 뭐가 있는지 살폈습니다. 필요한 공구는 집에 있었고(그래봤자 드라이버 정도), 쇼바에 바를 구리스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곧장 인터넷을 찾았고 2만 원 짜리 댐핑 구리스라는 특수 구리스를 하나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물품이 도착하고 며칠이 지나 오늘. 세탁기 수리를 시도했습니다. 세탁기 위에 유튜브 영상을 켜놓고 재생과 멈춤을 반복하면서 (이 과정에서 사람은 진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장갑을 끼고 작업했는데 목장갑은 사람의 정전기가 통하지 않아 집게손가락 부분을 가위로 잘라냈더니 보다 쉽게 재생과 멈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간단한 과정에서 희열을 느꼈습니다.) 분해를 시작했습니다. 


분해를 하곤 소리의 진원지를 살펴보니 아주 간단한 원리였습니다. 세탁통을 사방에서 붙잡아 주는 4개의 쇼바가 있는데 이것들의 윗부분에 구리스가 다 닳아서 통이 돌 때마다 텅텅 거리는 소음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구리스를 적당히 도포하고 다시 역순으로 조립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또 한 번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열 댓 개의 나사를 분리해야하기 때문에 역순으로 조립할 때 어디에서 빼낸 나사인지 헷갈렸는데 이때 A4용지 한 장을 가져와 펜으로 전후좌우 구획을 나눈 다음 해당 구역 위에 나사를 올려놓고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세탁기 뚜껑 전면 나사’, ‘뚜껑 들어내고 보이는 곳 두 개’ 이런 식으로 말이죠. 이 방법으로 하니 역순으로 조립을 마치고 나선 분해 전과 똑같이 되었습니다. 항상 역순 조립을 할 땐 나사가 한 두 개씩 남았던 과거와 비교한다면 매우 큰 발전입니다. 


작업을 마치고 세탁기를 작동 시켜봤더니 말 그대로 레간자처럼 조용하고 쌩쌩 돌아갑니다. 몰라서(더 자세히는 귀찮아서) 외부 업체에 맡겼다면 15만 원 정도 돈이 들었을 테지만 조금만 노력하니 단돈 2만원에 모든 작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전 관련 학과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건전지 +, - 극도 간혹 잘못 넣어서 고장인줄 알고 사용도 안하고 던져놓은 물건들이 종종 있는 사람임을 감안한다면 제 스스로에겐 대단한 일임은 분명합니다.


미디어(유튜브 등)의 발전은 전공의 종말을 초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또한 유튜브를 보고 기타를 배웠고, 자동차의 소소한 부품을 교체하고 책의 디자인을 배워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일은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일단 해보고, 이해하고, 그 다음은 반복의 연속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일은 다른 사람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죽하면 강남의 유명 성형외과에서 의사는 상담만하고 환자가 잠이 들면 업체 영업사원이 수술했다는 사건이 뉴스에 나올까요. (오히려 담당 의사보다 영업사원이 더 수술을 잘했다는 뉴스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세상에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복과 반복을 할수록 말이죠.


전문가는 달리 전문가가 아닙니다. 한 분야에서 여러 번. 실수 없이, 오랜 시간동안 숙련된 사람을 전문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탄탄한 배경 지식(더 정확히는 실수와 오류의 가능성을 제로에 가깝게 줄이는 것)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세탁기를 고치면서 안일했던 어제의 저를 반성하고 앞으로 더 가능성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약적이긴 하지만요.


게다가 돈도 아끼고, 세탁기의 모양새도 알게 되고, 쇼바가 일본어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고 이런 글도 쓰게 되고. 일거삼사득이 아닐까요?


나이키의 창립자 필 나이트는 자신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몇 가지 계명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남보다 우월하기 위해서는 모범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세상이 수용하고 있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따르다가는 한 번도 세상을 앞설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과 문명의 틀을 넘어서라는 것이다. 나이키의 좌우명처럼 "일단 한 번 해 보라(Just Do It)"는 것이다. 

구본형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충격 흡수장치. 공업 분야에 두루 쓰이기도 하나 특히 자동차의 완충장치를 말한다. 감쇠(Damping;댐핑)장치 + 용수철(Spring;스프링) 두개를 하나로 묶은 일체형 현가장치(Suspension;서스팬션)부품을 쇼바(Shock absorber;쇼크 업소버) 라고 부른다.


어원은 영어로 해당 부품의 이름인 업소버(absorber)이다. 직역하면 흡수기. 어감 때문에 유럽어-일본어-한국어를 거쳐 생겨난, 흔히 일제의 잔재라며 공격받는 부류의 외래어로 착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영어에서 한국어로 직접 유입된 단어인데 absorber를 압쇼바, 앞쇼바라고 부르다가 압을 앞으로 착각해 전륜은 앞쇼바, 후륜은 뒷쇼바로 잘못 알려지면서 앞과 뒤를 합쳐 통칭 '쇼바'가 된 것이다. 참고로 일본에는 '쇼바'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고 '쇼크'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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