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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한 Feb 21. 2021

그녀의 턱 끝

저희 회사 건물엔 5개 회사가 입주해있습니다. 주차면은 다섯 면이고 입주사 별로 1대씩 주차 자리를 배정 받았기에 자리가 모자랄 일은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2층의 법무사님은 차를 가지고 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으니 서울 한복판에서 이정도면 감사할 따름인데요.


문제는 주차장이 건물 지하에 있거나 별도의 관리를 해주시는 분이 없고 1층 노면에 노출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지하철 역 바로 앞이다 보니 몰래 주차를 해놓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전화번호라도 있으면 전화를 걸 수 있지만 몇몇 사람들은 주차할 때만 전화번호를 치우고 사라지곤 합니다. 그럼 결국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회사 근처를 빙빙 돌다가 결국 근처 유료 주차장에 주차를 하곤 하는데요. 


유료 주차장에 주차를 해두곤 수시로 확인하면서 자리가 비워지면 차를 옮겨야지 하고 있다가 일하다 보면 깜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근 시간에 주차를 해놓고 퇴근 할 때 찾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보니 지금까지 주차비용으로 낸 금액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오전. 이곳저곳 볼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차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2시간 정도 볼일을 보고 돌아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른 차가 주차가 되어있습니다. 다행이 살펴보니 전화번호가 있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얼마간 신호가 가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중년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0000 차량 차주 되시죠? 혹시 저희 빌딩에 볼 일을 보러 오신건가요?” 입주사 손님일 수도 있기에 최대한 공손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하는 말이,


“저요? 아니요. 그 앞에 음식 좀 사러 왔는데요? 왜요?”

“다름이 아니라 저는 여기 입주해있는 사람인데요. 지금 주차를 하려고요. 혹시 차를 빼주실 수 있을까요?”


“저 음식 기다리고 있어요. 거의 다됐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통보인지 명령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먼저 전화를 끊었습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화내면 정신 건강에 좋지 않기에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마인드 컨트롤을 했습니다.


‘그래, 지금 이분은 집에서 몸져누운 가족이 있는 거야.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말했고 그녀는 한달음에 그것을 사러온 거야. 그런데 하필 그 음식점이 주차도 어려운 복잡한 골목에 있었고 때마침 잠깐 주차해도 될 듯 한 공간을 발견한 거지. 당연히 그녀가 잘못한 것은 없어. 단지 이 복잡한 골목에서 주차 자리를 비워둔 내 잘못이야.’


속으로 되도 않는 주문 같지도 않는 주문을 외우고 있는데 어이없게도 신기한 것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었습니다. 이래서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한가 봅니다.


저는 이면도로에 비상등을 켠 채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렸습니다. 1분...5분...1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대로 안 되겠다 싶어 어쩔 수 없이 근처 공영 주차장으로 차를 옮기려는 찰나 저 멀리 50미터 전방 맘스터치 입구 문이 벌컥 열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 중년 여성이 오른손에 맘스터치 봉지를 들고 허벅지 까지 내려오는 검은 패딩, 부스스한 머리, 수면바지를 입고 나섰습니다. 순간 저의 뇌 내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기저핵이 저에게 외쳤습니다. “저 자다!”


그녀는 곧장, 하지만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제 차와 5미터 정도 되는 거리가 남았을 때 머릿속에서 몇 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쳤습니다.


‘당장 내려서 한 마디 해줄까? 임대료 안 깎아주는 건물주 때문에 한 달에 수 백 만원 씩 꼬박꼬박 이체하기 때문에 이 주차장도 내가 주차할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하며 당신은 무슨 권리가 있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주차했냐고 물어볼까? 진짜 집에 아픈 사람이 있나? 그냥 소리나 한 번 지를까?’


소용돌이 같은 생각이 들면서 머릿속으론 이미 그녀의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화를 내버리면 지금까지 참은 내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았기에 차 왼쪽을 스칠 만큼 다가온 그녀를 향해 창문을 열었습니다. 창문이 내려가는 것을 눈치 챈 그녀가 저를 왼쪽으로 내려다봤습니다. 기름진 얼굴, 화장을 하지 않아 가려지지 않은 쌍꺼풀 수술자국. 혼돈스런 와중에 혼자만 유난히 오똑한 콧대. 최대한 절제 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차량 오른 쪽으로 나가실 건가요? 왼쪽으로 나가실 건가요?”


그녀 차 앞에 정차를 해두었기에 최대한 그녀가 차를 빼기 좋게 제 차를 움직여주려고 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그녀는 1초 정도 생각하더니 턱 끝으로 저쪽을 가르기 키며 “저쪽이요.”


아마 날이 추워서 왼손은 주머니에 넣어두어야 했고, 오른 손은 맘스터치를 들어야 했기 때문에 방향을 가리킬 수단은 턱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전 이렇게 오늘도 불필요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서 기분 좋은 오후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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