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의도한 것도 아니고 계획한 것도 아니다. 그저 무의식 속 ‘지금’을 도피하고 싶은 갈급함에서 나오는 경우다. 난 위기가 주는 절망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나를 변화시켜주는 것은 이것만큼 확실한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2015년 반 우발적으로 내뱉은 ‘퇴사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내 일생일대 가장 큰 위기와 변화를 초래한 말이었다. 더 이상 고정 수입이 없는 현실에서 만들어 놓은 마이너스 통장, 각종 보험, 카드 값은 불과 몇 개월 되지 않아 통장의 잔고를 형편없는 수준으로 끌어 내렸다. 실제 밥을 굶는 날이 생겼다.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시대에 밥을 굶다니. 하지만 사실이었다. 밤이 되면 비워지는 남의 사무실에 얹혀살면서 편의점 도시락조차 사먹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을 땐 도시락 한 개를 하루 두 끼로 나누어 먹었다. 돈이 떨어지면서 자존감도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란 생각만 나날이 커져갈 뿐이었다. 사람은 심리적으로 힘들 때 조언보다는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때문에 “지금 너의 문제점은...”이라는 말보다 “그랬구나. 힘들었겠다.”는 말이 더 큰 도움이 된다.
사람들은 힘들 때면 다양한 방법으로 위로를 받는다. 누군가는 친한 사람을 만나면서, 또 누군가는 주말도 없이 일에 몰두하면서 말이다. 당시 난 이것을 강연과 서점에서 찾았다. 맹세코 그 전까지 난 누군가의 강연을 듣는다거나 서점을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갈길 내가 알아서 가면 되지 왜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지 이해를 못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니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강연을 찾아 돌아다녔다. 당시 웬만한 연예인급의 인기를 누리던 강사의 강연이 내일 전라도 어디서 열린다고 하면 다음날 새벽 4시에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비록 그에게 말 한번 붙여보지 못했지만 그의 강의를 듣고 나면 불붙은 열정으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동경했다.
하지만 이런 자기계발 강연의 부작용 중 하나는 그 불꽃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빈도가 잦을수록 불이 꺼지는 속도도 빨랐다. 그러기를 1년. 더 이상 강연을 가지 않았다. 그동안 난 더 피폐해져갔다. 나이는 서른 중반을 넘어섰고 사회적 쓸모가 더 이상 없는 사람이 되었다. 밤이 되면 머리 위로 가득 내려앉은 밤하늘이 몇 번의 잘못된 충동을 느끼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