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새벽의 노마드

세 번째 게임. 그리고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by 마이즈

세 번째 프로젝트를 고민하던 중, 조라 대표님이 말했다. 마스터는 카드 게임을 잘 만드는 것 같아요. 지난번 로그라이크를 로그라이트로 바꾸면서 카드시스템을 넣었잖아요? 덱 빌딩 방식이요. 그걸 중심으로 구상하는 건 어때요? 그 말에 로그라이트 덱 빌딩을 중심으로 여러 소재를 제안했다. 그중에서 선택하신 것은 생존 게임이었다. 세상이 멸망한 상태에서 생존하는 게임. 신규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브리핑하자 새로운 디자이너는 멋진 콘셉트 아트를 그려주었다. 그림만 봐도 당장 게임을 만들고 싶어졌다. 이걸로 갑시다! 벙커 라이프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회사 워크숍 장소는 강원 랜드였다. 게임 만드는 사람이라면 카지노도 한 번은 가봐야지요! 너무 멋졌다. 조라 대표님은 직원 개개인에게 10만 원씩 쥐어 주시며 절대 이 금액 이상은 쓰지 말라고 하셨다. 아침 일찍 도박 중독에 대한 교육을 받고 카지노에 입성했다.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저녁에는 직접 가져오신 재료들로 요리를 해 먹었다. 다 같이 마작도 쳤다. 돌아오는 길에는 조라 대표님이 추천하는 막국수 맛집에 들러 식사를 했다. 회사 워크숍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자연스럽고 편안해서 신기했다. 회사 동료가 아닌 가족인 것 같잖아?

어느 날, 일하는 중 밖에서 연기가 새어 들어왔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 봤는데, 복도 끝에 있는 흡연실에 검은 연기가 가득했다. 불이 난 것이다. 황당하게도 위층 아래층 사람들이 몰려와서 끌 생각은 안 하고 불구경만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있는 소화기를 들고뛰어 나가며 소리쳤다. 소화기 더 가져오세요! 119에 신고하세요! 흡연실에서는 에어컨 실외기가 불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소화기를 뿌렸다. 불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한참 불과 싸우고 있는데, 누군가가 등 뒤에서 흡연실에 들어왔다. 우리 프로그래머가 다른 층에서 가져온 듯한 소화기를 들고 있었다. 내가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는 동안 그가 안쪽의 화점을 공략했다. 결국 두 사람의 고군분투 끝에 불은 완전히 꺼졌다. 온몸이 소화기 분말로 엉망이었다. 흡연실 문을 열고 나가며 사람들이 환호하거나 박수를 칠 거라고 상상했다. 불 꺼진 것을 확인하자 사람들은 흥미를 잃은 듯 돌아서서 각자의 층으로 돌아갔다. 고생했다거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이게 뭐야. 조라 대표님은 나중에 돌아오셔서 이야기를 들었다. 본인이 그 자리에 없던 것을 많이 아쉬워하셨다. 나와 같은 경험 주의자이시니까. 그나저나 불도 났으니 이번 게임은 잘 되려나 봐요.

검은 바지가 이런 색이 되어 버렸다.

게임 출시 직전. 나 스스로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일본 스트리머를 타깃으로 개발한 게임이었다. 우리처럼 마케팅 비용을 쓸 수 없는 회사라도 그들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사람들에게 퍼져 나갈 것이다. 때가 되면 업데이트를 할 수 있도록 거의 모든 내용을 툴과 데이터 테이블로 만들어 두었다. 애초에 패러디가 가득한 게임이니 신작 영화든 이슈가 되는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이든 다 집어넣을 수 있다. 콘솔 게임이지만 트렌드를 따라가며 확장될 수 있는 방식을 시도했다. 기존에 없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었기에 이 게임이 잘 된다면 오랜 맹세를 지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했다. (맹세) 하지만 조라 대표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게임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해하셨다. 이번에도 잘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큰 손해를 안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셨다. 조라 대표님 자신은 이 게임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게임은 일본 게이머, 그중에서도 스트리머와 스트리밍 시청자를 타깃으로 한 게임이다. 한국 스타일의 게이머인 대표님에게 잘 맞을 리가 없었다.

조라 대표님은 그 불안감을 여러 번 나에게 토로하셨다. 어쩌면 내가 확신을 주기를 바라셨던 것일까? 하지만 한번 사업을 크게 실패해 빚을 갚고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본인이 선택하셔야 한다고. 불안하면 심지어 접으실 생각까지, 극단까지 고려해 보셔야 한다고. 나의 답변은 회사나 프로젝트를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표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여나 게임이 실패해서 큰 빚을 지게 된다면? 내가 갚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결국 대표님의 빚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번 게임만큼은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 동안의 고민 끝에 결국 조라 대표님은 결단하셨다. 그렇게 게임 출시 직전, 우리 개발 팀은 해체되었고 나는 퇴사하게 되었다. 적어도 결과를 보고 나왔더라면 달랐을까?

게임 출시 후, 한국에서는 여러 혹평이 나돌았다. 블로그에 찾아와서 악플을 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정도의 애정이라니. 감사했다. 욕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타깃이 아닌 분이셨을 테니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 와중에 게임에 푹 빠지는 분들도 있었고 나중에 가르친 학생들 중에는 인생 게임이라고 말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아마 이 분들은 플레이 성향이 일본 게이머와 비슷해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어떻게 되었냐고? 예상대로 유튜브를 타고 퍼져나갔다. 230만이 넘는 구독자의 유튜버가 플레이를 했고, 4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일본 스트리머들이 하나둘씩 이 게임을 시작했다. 특히 버튜버들이 많았다. 그 와중에 게임의 위키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또 다른 이슈가 되었다. 애초에 공략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100명이 게임을 하면 100명의 데이터는 모두 조금씩 달라진다. 심지어 게임을 하면 할수록 변화해 간다. 따라서 공략에 대한 SNS 언급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나름의 전략이었다. 이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적중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명확하지 못한 부분은 한국 유저들이 싫어하는 포인트 이기도 하다.

최대 조회수 40만을 찍고 많은 스트리머들이 도전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였다. 이 타이밍에 업데이트를 치면서 스트리머들의 반응과 트렌드를 반영해서 변화하는 게임이 되어야 했다. 스트리머들을 등장시키거나 일본에서 유행하는 애니메이션을 패러디한 요소를 더해가며 마케팅을 한다면 효과가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게임은 나의 생각대로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비록 개발팀은 모두 그만두었지만 다행히 데이터 테이블을 통한 업데이트 방식이 어렵지는 않다. 조라 대표님은 평생을 게임 개발과 함께 지내오신 슈퍼 프로그래머이다. 알아서 하실 거라고 생각하며 지켜봤지만, 결국 게임은 한참이 지나도 출시된 모습 그대로였다. 이 또한 그분의 판단이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퇴사하기 전 날. 조라 대표님과 말하는 도중 갑자기 버럭 하셨다.


“마스터! 당신은! ……… 아닙니다. 됐어요.”


진심으로 화내시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오해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전까지 한 번도 화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을 끝내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모습에서도 불편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왜 화내시는지는 묻지 않았다. 누군가의 말을 나보다 더 믿었다면 그것도 싫을 것 같았다. 괴 문서를 믿은 그들에게 상처받았기 때문일까? 이 분이 신뢰를 잃었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나에게 해명을 요구하시기 전에 이미 판단하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혹은 무언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잘못을 했던 것이겠지.

조라 대표님의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 이곳이라면 죽을 때까지 평생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인원은 적지만 그에 맞는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었고 일하는 시간도, 그 외의 시간도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웠다. 조라 대표님은 마인드도 실력도 게임 개발자로서 존경할만한 멋진 분이셨다. 무조건 신입을 뽑아서 가르쳐서 큰 회사로 이직시키는 마인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무조건 손해 아닌가? 존경할 수 있는 대표님과 그분을 보좌할 나의 역할이 분명하기에 느낄 수 있는 안정감.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는 곳. 규모는 작지만 꿈에도 그리던 콘솔 게임을 만드는 회사. (카메라 시점이 꼬였을때) 그렇게 마음을 준 곳이었기 때문에 퇴사하며 마음에 폭풍이 불었다.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준 곳에서도 결국에는 나가게 된다. 벌써 그동안 다닌 회사 수는 두 자릿수이다. 이런 경험 끝을 하면서도 더 이상 회사라는 조직을 믿을 수 있을까? 심지어 나는 40대이다. 이제는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변해야 할 시점이다. 회사를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노마드가 되기로 했다. 가을 하늘을 지나 겨울의 해가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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