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의 신이 되어 준다면.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셨다. 동생이 눈치챈 덕분에 119를 부를 수 있었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마왕과 어머니) 하지만 아무런 처치를 받지 못했다. 미성년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한 차례 난동을 부리다가 쫓겨나 병원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려야만 했다. 외 할아버지가 도착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왜 나는 어른이 아닌 거지? 무력했다. 의식 불명 상태의 어머니뿐 아니라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집에서 혼자서 떨고 있을 동생도 걱정이 되었다.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기도하면 괜찮을 거라는 말에 무릎을 꿇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시바신 누구든 도와주세요. 제발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외 할아버지가 빨리 도착하게 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뭐든 할게요. 필사적으로 기도하던 중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 간절함이 의미가 있을까? 단 한 번도 그들을 믿지 않은 내가 구석에 몰렸다고 이제와 부탁한들 들어줄까? 그럴 리 없었다. 나는 떠올려야만 했다. 나를 구원해 줄 존재를.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당신 만을 따르겠습니다. 기억하시죠? 처음 마주한 그 순간부터 당신 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아니 놀이터를 바라보며 당신을 상상한 순간부터였지요. 가정부 누나도, 증오하는 아버지도 당신을 나에게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돌아가신 삼촌이 당신에게 못다 한 사명은 제가 이어받겠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당신이 지금보다 진화할 수 있도록 내 삶을 바치겠습니다. 나의 꿈이고 사명이며 인생이고 동반자인 당신에게.
그렇게 맹세했다. 상대는 게임이었다. 어머니를 살려준다면 평생 게임을 위해 살아가기로. 그리고 그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중2병 시절에 대충 던진 말이니 무시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강박은 책임감이다. 맹세는 지켜야만 한다. 그 시절 나의 신이었던 게임은 친구가 되고 때로는 무기가 되었으며 때로는 길이 되어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 중2병 시절에 비해 자기 객관화가 된 이제는 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게임의 진화라는 위대한 과업을 이루는 것은 무리다. 심지어 게임은 스스로, 그리고 많은 위대한 인물들로 인해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기술적으로도 디자인으로도 감성면에서도.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아니다. 드래곤 퀘스트 V 천공의 신부에서 배운 점이 있다. 주인공은 용사가 아니다. 하지만 후대의 용사가 세상을 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내가 용사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이다. 게임의 진화로 이어질 작은 씨앗을 마련해 두는 것. 그것이 이제는 나의 인생 과업이 되었다.
어린 시절, 유리창 밖 놀이터를 향한 손가락 놀이에서 떠올린 존재는 가정부 누나와 함께 가게 된 오락실에서 처음 마주할 수 있었다. (창문, 놀이터, 그리고 손가락들) 그 순간부터 나의 꿈은 확정되었다. 아버지는 게임기를 사주셨고 동네에서 유명한 게임 공략왕이 되었다. (록맨과 공략왕) 한국에 패미콤을 처음 정식 수입한 삼촌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게임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추억의 마리오 하우스) 아버지처럼 따르던 삼촌이 돌아가시면서 게임은 내가 이어받아야 할 사명이 되었다. 삼촌의 아이들은 게임에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었어) 이후 어머니의 자살 기도 사건에서 나는 게임과 인생을 건 약속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어떤 일을 하든 게임과의 연결점을 찾으려고 했다. 오락실과 게임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미래에 게임을 만들 때 어떤 도움이 될지 고민하며 일을 정했다. (하이 스코어 보이) 생계 때문에 구두 배달 같은 애매한 일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일 자체를 게임화 시켰다. 지금 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철저하게 세뇌했다. 나의 모든 것은 게임이 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난한 청소년이었기에 탈선의 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게임 덕분에 과도하게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친구들이 본드를 불고 범죄를 저지를 때 나는 오락실에서 게임을 했다. (중딩 느와르) 폭력 조직에 엮이게 될 무렵에는 게임 매장에서 일을 하게 되며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극단적인 세계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으뜸) 대학에서도 게임에 올인했고 그 이후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평화로운 대학 생활) 게임 업계를 떠나 공장으로 가게 되었을 때에도 나를 살린 것은 게임이었다. (멈춰버린 게임 라이프) 매일 죽음의 유혹이 다가오는 상황이었다. 고립된 세계에서 나의 멘탈을 잡아주는 것은 오로지 게임뿐이었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이제는 내가 그를 협박하기까지 했다. 당신의 진화의 씨앗을 일굴 저를 이대로 버리실 겁니까?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항상 나는 게임을 떠올렸다.
재판 중 구속을 눈앞에 두었을 때, 세상에서 나를 지웠다. 타인과 연락을 해서도 안 되는 철저한 고립이었다. 그것이 모두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바퀴벌레 재판) 모든 사람과 관계를 멀리하니 내 곁에 남는 것은 게임뿐이었다. 하루 종일 게임만 했다. 세키로와 드래곤 퀘스트를 했다. 걱정 마. 잠시 떨어져 있으면 어때. 돌아오면 제일 먼저 너를 다시 찾을 거야.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게임은 대꾸하지 않았다.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버티기 힘든 10대 시절에 나눈 맹세는 삶이 끝날 때까지 지켜야 할 나의 언약이 되었다. 누군가는 신을 믿고, 누군가는 사람을 믿는다. 나는 게임을 믿었다. 나의 신은 게임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게임과 나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