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하고 무능해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
가정부 누나가 장을 보러 가는 날, 같이 가고 싶다고 졸랐다. (유일한 언니) 옆에서 칭얼대자 귀찮았던 걸까? 언니가 필요한 것 좀 사고 있을게, 저 쪽에 가서 먹고 싶은 과자를 골라오렴. 그 말에 신이 나서 달려갔다. 과자 코너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사탕을 하나 건네준다. 먹을래? 싫어요. 계산하고 먹어야 해요. 너 참 똑똑하구나. 아저씨가 상을 줄게.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되니까 이리 와 봐. 아저씨는 마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청난 비밀 이야기인 것처럼. 저 밖에 사탕으로 가득 찬 트럭이 있어. 같이 가보지 않을래? 고개를 끄덕이고 아저씨 손을 잡았다. 슈퍼에서 나가서 잠시 걸어가니 공터에 주차된 봉고차가 하나 보였다. 저 안에 사탕이 가득 있어. 먹고 싶은 만큼 다 가져가라. 난 이빨이 아파서 많이 못 먹거든. 오 정말요? 아저씨의 손을 놓고 봉고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면 사탕이 와르르 쏟아지겠지? 돌아보지 않았지만 뒤에서 아저씨도 미소 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에 거의 다 다 달았을 무렵, 옆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마이즈 아니니? 왜 너 혼자 있니?”
옆을 돌아봤는데 웬 아주머니가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지 기억은 나질 않았다. 상관없다. 나는 잔뜩 신난 상태였으니까. 흥분해서 외쳤다. 저 차 안에 사탕이 가득 있데요! 그 말을 들은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와서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왜 그러세요? 사탕차가 가버려요! 돌아보니 아저씨도 이미 사라진 뒤였다. 순간의 기억은 여기에서 끊겼다. 그날 밤. 가정부 누나는 어머니에게 크게 혼이 났고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앉히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누가 사탕 준다고 해도 절대 따라가면 안 돼. 정확한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사탕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라고 하셨다.
아버지 쪽 사촌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맏형이다. 그 해는 유일하게 나 혼자만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직 학교도 못 들어간 꼬꼬마들의 대장인 셈이다. 추석에 사촌들이 모여 있는데, 문득 학교 구경을 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어른들에게 말하니 학교 구경을 하고 그 앞 문방구에서 장난감을 하나씩 사라며 돈을 주셨다. 사촌 동생 넷을 이끌고 10분 거리에 있는 학교를 향했다. 운동장에 가서 미끄럼을 몇 번 탄 뒤에 장난감을 사러 교문 앞 문방구로 향했다. 평소라면 도둑질을 했겠지만, 오늘은 사촌 동생들이 있으니 참기로 했다. 모범을 보여야 하니까. (당신의 ...를 훔쳐갑니다) 장난감을 하나씩 사고 집으로 향했다. 문제는 육교 위에서 벌어졌다. 우리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야, 너네 가진 것들 다 내놓고 가! 뭐야 넌? 난 Q라고 한다. 내 이야기 들어본 적 있을 텐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1학년 중에 어른과 싸워도 이긴다는 아이.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까지 도는 동네의 무법자였다. 하지만 나는 맏형이었다. 사촌 동생들 앞에서 모양 빠지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다. 덜덜 떨면서 말했다. 싫어. 이건 우리 거야. 그다음 장면은 뻔하다. 나는 배를 걷어차였고 바닥에 누워 우는 동안 Q는 동생들의 장난감을 모두 빼앗아 가버렸다. 비참하고 억울한 감정보다 부끄러움이 더 컸다.
집 앞 놀이터에 나갈 때마다 만나게 되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강모’라고 하자. 녀석은 활달하고 잘 뛰어다녔다. 그러면서도 몸이 약한 나를 곧잘 끼워주곤 했다. 미끄럼틀에서 탈출 놀이를 하고, 철봉 근처에서 돈가스 게임도 했다. 정글짐 위에서 함께 타이거 마스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녀석은 놀이터의 리더 격인 존재였다. 한 번은 강모의 집에 놀러 가게 된 적이 있었는데, 집 전체가 내 방만한 크기라서 깜짝 놀랐다. 어머니와 함께 갔던 친구들의 집은 모두 우리 집만큼 컸기 때문이다. 강모에게 우리 집을 자랑하고 싶었다. 놀이터 바로 앞에 마주 보이는 저기가 우리 집이야! (맨션 오브 서교) 그래? 나도 한번 가보고 싶다. 처음으로 강모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생겼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데려갔다. 내가 모으던 졸리 게임을 같이 했고, 가정부 누나는 과일을 깎아 주었다. (보드 게임만 했을 뿐인데) 그날은 하루 종일 놀이터가 아닌 우리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TV에서 애국가가 나오는 시간이 되어서야 강모는 집에 돌아갔다. 나도 만화를 봐야 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날 밤에 일어났다. 애지 중지하던 물개 모양의 저금통이 사라진 것이다. 이미 4마리를 꽉 채우고 다섯 번째 물개를 채우는 도중이었다. 책장 위에 나란히 진열해 두었는데 어디로 간 걸까? 설마 강모가 가져간 것은 아니겠지? 에이 아닐 거야. 엄마나 언니가 숨겼겠지. 어렴풋한 의심은 서서히 확신이 되었다. 그날 이후 강모는 나를 조금씩 멀리 했고 내가 놀이터에 나가면 집으로 가버리기까지 했다. 그랬구나. 역시 인간은 믿으면 안 되는 존재야.
이 일들이 떠오른 것은 고소를 당한 직후였다. (아홉 번의 실수)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고 사회에서 마녀 사냥까지 당하자 어린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사탕 아저씨도, Q도, 강모도 결국 원하는 것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간접적으로 알려주었으나 끝까지 정신 차리지 않자 제대로 훈계하는 것 같았다. 지금 나를 고소한 동료들도 결국은 세상의 일부다. 모두가 나를 공격하고 버리고 빼앗는 세상에서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멍하니 있는 나를 향해 어머니가 말을 걸었다. 너 잃어버렸을 때 말이야. 엄청 울었었는데, 기억나니? 울먹이는 목소리셨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보니 TV에 실종 아동을 찾는 어머니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문득, 경찰서에서 오열하며 달려오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동생을 품에 안은 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갔던 친척 집. 동네가 신기해서 슬쩍 집을 나갔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경험이 흥미 진진 했다. 구경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했을 때 경찰서에 들어갔다. 저, 길 잃었는데요. 엄마한테 연락 좀 해주세요. 주소는 이러저러하고, 전화번호는 이 번호예요. 아빠 성함은 XXX, 엄마 성함은 XXX에요. 똘똘한 아이라며 경찰들이 사탕을 준 기억이 떠올랐다. 같은 사탕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그리고 보면 넌 모험심이 많은 아이였지. 제주도까지 혼자 걸어가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일면식 없는 대학 교수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잖아. (춤추는 수학 강사) 넌 참 자기 길을 잘 개척하는 것 같아. 어머니의 말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그리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찾은 나의 길은 결국 고소라는 형태로 되돌아왔다. 그것도 한때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을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보면 온몸이 상처로 학교에서 싸우고 온 일도 있었지. 제가요? 안양에서, 중 고등학교 때요? 아니, 더 어릴 때. 부유했던 시기에 내가 누군가와 싸움을 한 적이 있던가? 한 참을 생각했다. 무슨 일이었지? 평소라면 떠오르지 않으면 금방 포기했을 것이다. 그리 중요한 사건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기억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아마 현실을 외면할 핑계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끈질기게 기억을 파고든 끝에 그 장면에 도달했다. 초등학교 3학년 시기. 동생이 초등학교 1학년으로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던 때였다. 교실 창문으로 운동장을 보고 있었다. 모래판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 동생에게 누군가가 다가섰다. 여전히 악명을 날리고 있는 Q였다. 그놈을 보는 순간 교실을 뛰쳐나갔다. 멋지게 한 방 날리고 싶었지만 도착할 무렵에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 대는 상태였다. 이 놈의 천식. (호흡의 무게) Q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동생 옆에 놈이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했다. 내가 헉헉 대며 다가서자 Q는 비웃으며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니가 육성 회장 아들이라며? 선생들이 다 너만 감싸더라? 정확한 대사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식이었다. 녀석 나름대로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분노를 풀 상대가 필요했던 걸까? 잠시 후 선생님들이 오셔서 폭행은 끝이 났다. 동생과는 이 일을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틀림없이 어머니는 알고 계셨을 것이다. 학교에 목소리가 많았으니까.
그 사건이 떠오르며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때는 동생뿐이었지만, 지금은 지켜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다. 달콤한 말로 꼬드기는 사탕 아저씨로부터, 폭력으로 갈취하는 Q로부터, 친근한 얼굴로 뒤통수를 때리는 강모로부터. 가족들을 지켜야 하고 연인을 지켜야 하며 내가 책임져야 할 프로젝트와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 나약하고 무능한 탓에 엉망진창으로 얻어맞기만 할지도 모른다. 함부로 사람을 믿은 탓에 배신당하고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뛰쳐나가야 한다. 지키기 위해서. 그것이 나의 의무이며 책임이다. 이를 위해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만 한다. 주저앉거나 절망해서는 안된다. 지키자. 내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망가지는 것을 겁내지 말자. 지키기 위해 살자. 포기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