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이상이 교차하는 교실
군 복무를 기점으로 초등학교에서 일하게 된 시절. 가장 큰 고민은 돈 문제였다. 가족들의 생활비와 동생 학비를 벌어야 했는데, 군인 월급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초등학교에 간 군인 아저씨) 외 할아버지의 공장 사택에서 머무른 덕에 다행히 가족들이 굶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모두 빚이고 신세 지는 일이었다. 수입이 생기면 외 할아버지에게 드리곤 했다. 당연히 안 받으려고 하셨지만, 우선 드리고 나서 돌려받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군 입대 전에 했던 댄스 팀 활동 이력을 이용해서 몇 군데에서 춤을 가르쳤다. (음악과 무대) 기독교가 아님에도 교회 청년부를 대상으로 하기도 했고, 초등학생에서 방과 후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가끔 한 번씩 공연을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수입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버는 돈을 다 합쳐도 50만 원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까. 고정적인 일자리가 간절했다.
그 와중에 몇 군데 대학을 찾아갔다. 게임 개발자가 되고 싶은데, 방법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수님 들이라면 어쩌면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근처에 있는 대학들에 무작정 쳐들어가서 컴퓨터 공학과, 소프트웨어 공학과 교수실 앞에서 진을 쳤다. 공책에 빼곡히 쓴 게임 기획서를 들고서. 쫓겨나는 것도 각오했지만 대부분 반갑게 맞아 주셨다. 세월이 지나 내가 교수 일을 직접 해보니까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 열심히 하는 학생을 마다할 리가 없지. 하지만 교수님들은 게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열심히 써간 게임 기획서도 의미가 없었다. 교수님 중 한 분이 말씀하셨다. 게임 기획은 이렇게 노트에 쓰는 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거라고. 남들 앞에서 자기 의견이나 기획을 발표할 수 있겠느냐고. 어쩐지 그럴듯했다. 무대에서 춤을 추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발표를 해야 한다고? 나의 기획을? 머리가 멍해졌다.
공연을 앞두고 늦게까지 연습을 하던 날. 밤 11시인데도 불이 환하게 켜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입시 학원이었다. 어? 문득 모든 것이 연결되었다. 초등학교 근무 후에 할 수 있는 고정적인 야간 업무. 수입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남들 앞에서의 스피치나 발표 연습을 할 수 있는 일. 집에 가서 벼룩시장을 펴고 입시 학원 구인 공고를 찾아서 동그라미 쳤다. 다음날부터 하나씩 직접 찾아가기 시작했다. 만약 서울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명문대를 다니지도 않았고 누굴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당시 구미의 학원가는 사람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부분 여자 선생님뿐이었는데, 남자도 하나쯤 필요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입시 학원에 취업을 하게 되었고, 오전에는 초등학교 일, 오후에는 입시 학원 일, 밤에는 춤을 추는 N잡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원에서 나에게 바란 것은 수업이 아니었다. 일단 컴퓨터를 잘한다는 점이 먹혔다. 교재 편집과 홈페이지 제작 및 관리를 했다. 학생들을 만날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그렇게 두 달쯤 지나고나서부터 테스트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이 쪽지 시험을 볼 때 감독관으로 들어갔다. 그 외에 책상을 옮긴다거나 힘쓰는 일을 할 때마다 동원되었다. 요즘 시대라면 한 사람에게 홈페이지 관리와 교재 편집, 기물 관리와 청소, 시험 채점과 감독까지 시킨다고 욕하겠지만 당시 나에게는 그저 감사한 일터였다. 그 외에 문제 아이들을 혼내는 일도 맡게 되었다. 여자 선생님들은 학 부모님들에게 이미지가 좋아야 하기에 정규 수업을 들어가지 않는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원장 선생님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여학생들에게서 고백 편지도 서너 번 받았다. 유일한 남자 선생님이고 나이대가 다른 선생님보다 가까워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선생님들은 조금씩 나에게 일을 넘겼다. 그 덕분에 시험 감독뿐 아니라 틀린 문제를 풀어주는 수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수학만큼은 자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하던 과목이었으니까. 고등반은 제외하고 초등반과 중등반의 거의 모든 문제 풀이를 담당했다. 거기에서 조금 더 지나자 초등 반은 아예 수학 수업까지 맡게 되었다. 인기도 한몫 했다. 이제는 원하던 대로 발표 연습을 잔뜩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잘 이해할지 수없이 고민했고, 이는 나중에 게임 기획서의 시스템이나 밸런스 문서를 작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학원이 시작하기 전에 시간이 남으면 오락실에서 머물다가 출근했는데, 그곳에서 마주치는 학생들도 많았다. 가끔은 주말 댄스 공연에 학생들이 보러 오기도 했다. 같이 오락실도 가고 최신 곡으로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 선생님. 학생들 입장에서는 친밀했던 것 같다. 그렇게 가까워지자 개인적인 고민이나 꿈에 대한 상담도 자주 하게 되었다. 항상 진심으로 대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나의 진심은 일반적인 어른, 특히 입시 학원에 학생을 보내는 부모님이 바라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리고 학원의 진짜 고객은 학생이 아닌 그들의 부모님인 것이 당연했다.
나의 수업에는 정해진 방식이 있었다. 오늘 진도까지 먼저 끝낸 사람에게 자유 시간을 주는 형식이었다. 자신의 꿈을 위한 활동을 하라고 했다. 소설가를 꿈꾸는 학생은 노트에 글을 썼고, 만화가를 꿈꾸면 그림을 그렸다. 게임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댄서를 꿈꾸는 아이는 수업 전에 미리 만나 간단한 춤 동작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시험이 끝나면 아이들과 오락실이나 노래방에 갔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무슨 공부를 해도 결국에는 자신의 꿈을 향해 가야 하니까. 하지만 이는 나를 고용한 학원 입장에서 큰 문제가 될 행동이었다. 학부모로부터 클레임이 들어온 것이다. 공부하라고 보냈더니 춤을 가르치고 같이 오락실을 간다면서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날은 빼빼로 데이였다. 수업을 마치고 자리에 돌아가보니 20여 개의 빼빼로가 쌓여있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부럽다며 한 마디씩 하는 와중에 원장 선생님이 옥상으로 호출했다. 괜히 눈치가 보여서 빼빼로 몇 개를 들고 올라갔다. 마이즈 쌤. 학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절대 다른 거 시키지 마세요. 무조건 수학만 해야 합니다. 네. 죄송합니다. 많이 화가 나 계신 것 같았다. 몇 개의 빼빼로를 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선물해 준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이후 의도적으로 아이들을 피해 다녔다. 조금 멀리 있는 오락실에 갔고 춤을 연습하던 장소도 옮겼다. 수업 중에는 가급적 다른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강의실에는 감시 카메라가 있었고 원장 선생님은 특히 내 수업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으니까. 교무실 안쪽에 있는 감시 시스템을 처음 보는 순간 정이 떨어졌다.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이건 너무한 것 아니야? 수업을 진행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우리는 감시당하고 있어. 얘들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너희 부모님에게 연락이 갈 거야. 아니, 어쩌면 같이 보고 계실지도 몰라!
결정적인 사건은 학원 회식이었다. 이 날, 조금은 수치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학원 선생님들은 전원 여성이었다. (학원 차량 기사님은 남자분이셨지만, 회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식사 후 노래방에 가게 되었는데, 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마이즈 쌤 춤춘다며? 전공 좀 발휘해 봐! 그 말에 아이돌 곡을 예약했는데, 그분이 원한 것은 춤 구경이 아니었다. 끈적한 블루스 노래를 틀더니 한 명씩 돌아가면서 껴안고 춤을 추라는 것이었다. 이를 즐기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나만큼이나 불편해하는 여선생님 들도 계셨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돌아가며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원장 선생님 눈 밖에 날 수는 없었으니까. 이 날을 기점으로 월 말까지 다니고 학원을 그만두었다.
당시에는 부당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더 나이가 들고 보면 이해되는 지점들이 있다. 어린 마음에 혼자 분노하고 나와 학생들 입장에서만 바라본 것 같다. 학원은 학원의 입장이 있고 부모님들은 부모님의 입장이 있는 거겠지. 매일 새벽까지 일하는 탓에 연애가 힘든 입장에서는 어리고 만만한 어린 남자를 껴안고 춤 한번 추는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상으로 심한 요구를 한 것은 아니니 그분들만의 선은 지킨 것이겠지. 나 때문에 공부와 거리를 두고 춤만 추거나 만화만 그렸다면 그 학생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그날의 경험 덕분에 누군가의 미래에 대해 조언을 하거나 이야기를 들을 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한다. 나의 의견을 전달하기보다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식의 대화가 아닐까 싶다. 짧은 몇 달간의 수업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