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고 보람을 느끼지만 정체성에서 벗어난 일
흰 늑대의 회사를 프리하게 나가던 중, 친한 지인들과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늑대와 일을) 게임 블로거 동생, 유명한 게임 기획자 선배, 그리고 게임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원장. 나를 포함한 4명이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학원의 고충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코로나 때문에 큰 위기를 겪으면서 유튜브도 시작하고 온라인 강의까지 시도했다는 경험담이었다. 듣다 보니 문득 학원 강의가 궁금해졌다. 혹시 강의를 하는 조건이 있나요? 오, 형님이라면 자격이 충분하지요! 어떤 과목을 하고 싶으세요? 저야 제너럴 리스트니까 뭐든 괜찮습니다. 학원에서 필요한 과목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꼭 기억해 둘게요! 그리고 몇 주 뒤, 원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게임 기획 전문 학원인 게임 캔버스. 이곳의 원장인 구본일. 그와는 오래된 사이다. 내가 왕자 님이라고 불리며 다닌 회사에서 바로 옆 팀이었으니까. (왕자님의 사내 정치 입문기) 그때부터 종종 연락을 지속했기에 이미 10년이 훌쩍 넘은 인연이었다. 강의 말인데요, 평일 낮 시간도 괜찮으시겠어요? 우리 보스인 흰 늑대는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OK 했다. 그런데 무슨 과목인가요? 당연히 시스템이나 밸런스를 부탁할 줄 알았는데, 요청받은 것은 게임 시나리오였다. 게임 업계에서 시나리오 기획에 대한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의아했지만, 일단 생각해 보기로 했다.
스스로 가장 중요한 것은 강사가 될 자격이 있는가였다. 시나리오 전문 기획자들도 많이 있는데, 내 강의를 들을 이유가 있을까? 납득하지 못한다면 함부로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깊이 고민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첫 입사는 게임 시나리오였고 이후 다양한 게임의 시나리오를 직접 작성했다. (김 부장의 멘토링) 웹 소설을 비롯해서 몇 가지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으니 글 실력이 크게 부족하지는 않다고 판단되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게임에서 엄청난 문학적 소양을 바라지는 않으니까. 디렉터가 된 이후에는 시나리오를 감수하는 역할만 했지만, 한일 공동 프로젝트와 외주를 진행했기에 회사의 니즈를 이해하는 면에서는 다른 시나리오 기획자의 강의보다 경쟁력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 정도면 강사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다음은 커리큘럼이었다. 게임 시나리오에 관한 책과 강의를 수집했다. 어라? 이게 게임 시나리오라고? 이상했다. 소설 작법이나 영화 시나리오에서 가져온 내용을 살짝 바꿔서 활용하는 부분이 많았다. 아직 정립되지 않은 걸까? 한국에서 나온 게임 시나리오 책들은 작성 방법보다 마음 가짐이나 업무의 롤에 대한 소개가 많았다. 그나마 괜찮은 책들은 오래된 것들이라 요즘 시대의 게임과는 맞지 않았다. 일본에서 나온 책들은 볼만했는데, 콘솔 게임의 나라답게 완성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방식을 활용할 수 있는 개발사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역시 수업에 활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괜찮은 자료는 MMORPG라는 특정 장르에 한정된 것들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게임 시나리오 교육이 없다고? 오히려 좋았다. 말라가는 땅을 되살리는 일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강의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국 게임 시나리오 강의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이미 글을 써본 사람들이었다. 웹소설 작가는 물론이고 문인으로 등단한 분도 계셨고 영화사를 다니다 왔거나 웹툰 PD나 극작가 등 다양한 글쟁이들이 모였다. 물론 글 쓰는 일을 전혀 안 해본 분들도 섞여 있었지만 역시 기본은 하는 분들이셨다. 그리고 보면 게임 시나리오를 목표로 하는데 글을 한 번도 안 써본 사람이 올 리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공생이나 전문가들도 있었기에 글쓰기 수업은 줄이고 시나리오의 게임화, 게임을 위한 시나리오 구성에 치중했다. 결국 취업이 목표였기에 후반부는 포트폴리오에 전념해야 했다. 그렇게 몇 기수를 보내면서 깨달았다. 취업이 문제가 아니다. 그 이후 수습 평가를 버티고 오래도록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억지로 취업을 위해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법을 가르친다면 학원의 성과는 올라간다. 따라서 템플릿을 주고 칸 채우기를 시키는 학원들도 많이 있다. 그렇게 억지로 취업률을 끌어올리면 당연히 나에 대한 평가도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학생들을 위한 일일까? 한 명이라도 더 취업시키기보다 오래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다. 길게 보면 본인들을 위해서도 게임 업계를 위해서도 옳은 방향인 것 같았다. 교육 방향을 바꿔 아예 생각하는 방법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들 힘들어했고 누군가는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며 중도 포기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회사에 입사하면 더 힘들 텐데. 업무와 맞지 않음을 느끼고 뒤늦게 고민할 거라면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내려놓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게임 기획 스쿨을 쓴 사람이 게임 시나리오를 가르친다는 것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SNS에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반가운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가정형 회사에 함께 다닌 서버 팀장님이 셨다. (만약에) 모두가 힘들어하던 상황에 과일을 깎아 주시며 멘탈 관리를 해주시던 분. 실력 또한 내가 알고 있는 서버 프로그래머 중 최고라고 생각하는 분. 동경하는 개발자이셨기에 더욱 반가웠다. 마이즈 님 오랜만이에요. 혹시 학생들 가르치는 일도 해요? 네. 이제 막 시작했어요. 나도 어쩌다 보니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혹시 시간 돼요? 다른 분도 아닌 이 분의 부탁이라면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기획반이 아닌 프로그램 반 강의를 요청하신 것이다. 어째서 기획 반을 위한 수업이 아닌지 여쭈었고, 답변을 듣고 또 한 번 감탄했다. 프로그래머들이 단순히 코딩만 잘해서는 안 된다. 기획을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커뮤니케이션 이전의 생각하는 방향의 문제다. 그리고 가끔은 게임에 대한 교양이 부족한 친구들이 있기도 하다. 따라서 커리큘럼에 기획자와 소통하는 법, 게임을 이해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역시 생각이 활짝 열려 있으시다. 그렇게 나는 게임 인재원의 프로그램 반에서 수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주 2회에 걸쳐 강의를 하던 어느 날, 기획 교수님들과 마주쳤다. 어? 마이즈 님 아니세요? 두 교수님 중 한 분은 SNS를 통해 교류하던 분이셨고, 다른 한 분은 사업하던 시기에 AR 전문가로 외주 용역을 소개받았던 분이셨다. 이렇게 또 우연히 만나게 되네요! 이를 계기로 기획반의 수업도 진행하게 되었다. 게임 밸런스 수업, 그리고 콘텐츠 디자인 수업을 담당했다. SNS를 꾸준히 관리하기를 잘했다.
대학에서도 여전히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게임 기획, 게임 소재 분석, UI와 UX, 게임 QA 등 모두 다른 과목이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일은 일을 불러온다고 했던가. 계속해서 강의가 들어왔다. 시간이 맞지 않아 거절하게 되는 경우도 생겼다. 그중 인상 깊었던 것은 강남 취업 허브로부터 게임 기획 취업 강의를 요청받은 일이었다. 온라인 오프라인 연계 강의라고 해서 큰 규모를 기대하고 갔는데, 50명이 넘는 신청자 중에서 현장에 직접 온 사람은 서너 명뿐이었다. 한두 명 밖에 없는 날도 있었다.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내 수업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혼자 말을 하고 있으니 광대가 된 느낌이었다. 심지어 강의장은 꽤 넓었다. 전원 오프라인으로 올 때를 대비해서 그렇게 잡았을 텐데, 더 휑한 느낌이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의미 없는 강의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취업 허브의 강의를 통해 진로를 찾은 분들이 나타나며 감사 인사를 보내오시기도 했다.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그 수업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취업에 성공한 분들도 여럿이었다. 벽에 대고 혼자 말하는 것 같은 막막한 수업이었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음을 알고 나니 뿌듯해졌다.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했다.
대학과 학원, 기관 강의를 하면서 아직 도달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다. 기왕 강의를 할 거면 꼭 도달해보고 싶은 곳. 기업 강의였다. 때마침 ‘현업 기획자 마이즈가 알려주는 게임 기획 스쿨’이 대형 게임사 도서관에서 대여 순위 1위를 차지했다. 이를 계기로 게임 업계 대기업에서 신입 사원 교육 강사로 제안이 왔다. 여기까지 하면 강의는 전부 해보는 거라는 생각에 당연히 수락하려고 했다. 하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이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도 좋은 것일까?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일까? 신입 사원들은 나를 개발자가 아닌 강사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대로 괜찮은가?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교육자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차에 다른 기회가 왔다. SSAFY. 삼성 소프트웨어 청년 아카데미와 연결이 된 것이다. 선배님의 주선이셨다. SSAFY에서는 게임 분야 멘토를 찾고 있었는데, 학생들의 프로젝트 멘토링을 해주는 형식이었다. 강의가 아닌 멘토링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게임 회사가 아닌 대기업에서 주관한다는 점이 끌렸다. 게임 대기업의 요청을 거절하고 SSAFY의 게임 분야 멘토를 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진행하면서 알게 된 문제가 있었다. 게임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직군이나 분야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잘 아는 분야의 질문보다 잘 모르는 분야의 질문이나 피드백 요청이 더 많았다. (카메라 시점이 꼬였을 때) 특히 서버 쪽은 게임 회사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배우고 있었다.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느끼게 되며 멘토링을 위해 매번 새로운 공부를 해야 했다. 오히려 좋을 지도?
수업을 하면 할수록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보다 창작하는 사람이고 싶다. 처음에는 흥미롭게 느껴졌지만, 반복되다 보니 가르치는 일에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나에게 게임은 역시 만드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니까. 그렇다고 하기 싫은 것은 아니다. 재미에 비해 보람을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손 편지를 받거나 제자들이 생일 파티를 해주는 등 감동적인 일도 많았다. ‘게임의 진화를 위한 씨앗을 심겠다’는 나의 목적에도 부합한다. 좁게 보면 누군가의 인생에, 넓게 보면 게임 산업에, 과장하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느낌도 받는다. 내가 강의를 그만두는 시기는 더 이상 나의 교육이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일 것이다. 쓸모없는 것을 가르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다만, 누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니 끊임없이 나의 강의를 돌아보고 피드백을 받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