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거점은 필요하니까
“형님, 회사 나오셨다면서요?”
흰 늑대의 연락이었다. 탄흔의 회사에서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그였다. (탄흔의 경유지) 쾌활하고 잘 노는 스타일로 가볍게 보이지만 그 역시 노력파였다. 우리는 여러 스터디를 함께 진행했고, 보드게임과 TRPG를 지속적으로 플레이했다. 흰 늑대는 몇 개의 게임 회사를 다니며 주말에만 경영하는 게임 외주 회사를 차렸다. 가볍게 시작했음에도 결국 중국 대기업과 연결된 대형 퍼블리싱 회사까지 성장했다. 흰 늑대는 게임 업계에서 강제 퇴출 당했던 나를 다시 데리고 왔다. 사업 본부장으로. (일곱빛깔 본부장) 하지만 그 회사는 뒤통수를 크게 맞으며 무너졌다. 흰 늑대는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사업 실패와 소송으로 최악의 상황에 놓였을 때, 힘이 되어 주었다. 외주를 주기도 했고 사무실 셰어를 해주기도 했다. 재판에서는 나를 위해 증언을 해주었다. (바퀴벌레 재판) 그는 나에게 있어서 속이거나 사기 쳐도 되는, 나를 배신해도 상관없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그만큼 많은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흰 늑대는 어느 개발 스튜디오를 성장시켜 대기업에 팔았다. 그렇게 하나의 스탭을 끝내고 다음 일을 찾는 타이밍에 내가 지인 회사에 소개를 해주었다. 이후 소속된 회사에서 정부 사업과 자 회사를 관리하며 나름의 성과를 냈다. 하지만 그는 늑대였다. 한 군데에 머물기보다는 자기 일을 도모하는 성격이다. 계약이 만료되자 그는 회사를 뛰쳐나왔다. 그리고 나에게 연락한 것이다. 흰 늑대의 제안은 심플했다. 자기가 갖고 있는 회사 중 하나에 들어와서 함께 일하자는 것이었다. 너무 감사한 제안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조라 대표님의 회사를 그만두며 결심한 노마드의 삶에서 멀어지는 이야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안을 거절하자 다른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가정형 회사에 같이 다녔던 친한 형님이었다. (만약에) 같은 시기에 사업을 하며 외주를 드리기도 했고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여전히 회사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XR과 영화 CG로 성과가 괜찮았다. 한번 보자고 하셔서 회사를 방문했다. 형님은 XR과 영화에 머물지 않았다. 앞으로 AI가 뜰 것이라고 했다. 저 AI는 잘 모르는데요? 하지만 XR과 센서는 잘하지? AR도 할 줄 알고 음성 인식 프로젝트도 해보지 않았어? 그건 해봤지요. (생존형 개발자) 지분 줄 테니 우리 회사 들어와라! 기술 이사 직함으로 어때? 감사한 제안이었지만 나의 정체성은 테크 기업보다 게임 회사에 더 맞았다. 형님이 나의 절친인 토이 군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역시 완곡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일주일 뒤, 형님이 거부하지 못할 제안을 하셨다. 주 1 회만 출근해라. 그렇게 하면 다른 날에 너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잖아? 주 1 회면 얼마나 주실 건데요? 형님이 제시한 월 급여는 이전 회사에서 주 5일을 다닌 급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금액을 떠나서 이렇게 무리하시는 조건으로까지 나를 원한다고 하니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토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주 1 회씩 회사를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XR 콘텐츠와 코딩 로봇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AI를 학습했고, 어느 시점부터는 AI 딥러닝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덕분에 관련된 기술과 이론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부사장님은 AI 기업의 임원 출신이었기에 전문성에서 특출 났다. 이런 분이 바로 옆 자리에 있으니 나의 시야는 더욱 확장되는 듯했다. 형님은 AI를 영화와 스포츠, 두 분야에 모두 활용하고 싶어 했다. 직함이 기술 이사인 이상 이 회사의 모든 기술은 내가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외부 업체와 진행하는 기술 미팅에 참여해서 설명하고 논의해야 했으니까. 심지어 이 회사는 의료 분야까지 진출했다. 대표인 형님이 사업적으로 일을 잘 벌리는 타입이었다. 출근은 주 1회였지만 거의 매일 공부를 해야 했다. 나의 이런 면을 꿰뚫고 있으셨던 거겠지. 일단 시작하면 대충 넘기지 않고 집중해서 진행한다는 것을. 그래서 주 1회를 부르셨던 것이 아닐까?
출근하지 않는 날은 다른 일들을 다양하게 시도했다. 대학 강의는 지속했다. 아동 복지 센터 같은 곳에 보드게임 수업을 진행해 보기도 했고, 칼럼을 의뢰받아 쓰기도 했다. 이 시기에 들어온 일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게임 시나리오 감수였다. 게임 업계는 서브 컬처라고 일컫는 소위 오타쿠 게임으로 개편되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 서브 컬처 게임 계에서 유명한 분들은 대부분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그 말은 겸업 금지 조항 때문에 외부 일은 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나는 프리했고, 오타쿠 강연 시절부터 여전히 나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셨다. (내가 오타쿠다) 여기에 20년간 블로그에 꾸준히 애니메이션 리뷰를 써온 덕에 과거부터 현재까지 검증된 오타쿠라는 이미지가 생긴 것 같았다. 서브컬처 게임 시나리오의 감수를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검증된 게임 기획자 겸 오타쿠였던 것이다.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왜 감수가 필요했던 것일까? 게임의 트렌드는 서브컬처 애니메이션 스타일로 전개되었지만, 실제 게임 개발자 중에는 오타쿠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했다. 주 1회 나가는 회사에서 이전 회사 월급만큼의 수입이 들어오고 대학 강의와 감수, 칼럼과 특강 등의 일을 받았다. 한동안 생활비를 빌려야 할 정도로 쪼들리던 상황은 급격히 좋아졌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 메일 계정이 삭제되었다. 그룹웨어도 접속되지 않았다. 출근해서 사무 보시는 분께 여쭈어보니 대표님의 지시라고 했다. 뭐. 이제 쓸모가 없어졌나 보다 싶었다.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미리 말이라도 해주면 좋았을 텐데. 말없이 쫓겨나는 상황이다. 토이는 그럴 줄 알았다고 했다. 아무튼, 이 회사는 여러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고 그중 일부는 내가 책임자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만 명확히 교체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지막 급여는 굳이 요구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몇 달간 과하게 받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형님이 어떻게 나오실지 예상이 되어 싸우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한번 느꼈다. 역시 회사는 믿을 수 없어. 이 회사를 다니면서 AI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에 대해 많이 공부했다. 직접 구현하고 적용하는 것을 보며 실습형 학습을 한 셈이다. 그것 만으로 충분하다. Chat GPT가 대중화되기 이전, AI 프로젝트를 진행해 본 사람이 거의 없는 시기였다.
갑자기 퇴직하게 되며 시간이 많이 남았고 동시에 수입이 줄었다. 그동안 빌린 돈을 갚으려고 들어오는 대로 다 보냈는데, 조금은 남겨둘 걸 그랬나 싶었다. 어디에서 돈을 벌어야 할지 고민하니 머리가 아팠다. 혼자 있고 싶어졌다. 그럴 때면 영화관에 간다. 합법적(?)으로 휴대폰을 꺼도 되는 시간이라서 온전히 세상과 단절될 수 있으니까. 동시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마땅히 볼 영화가 없어서 적당히 시간이 맞는 한국 영화 표를 샀다. 마동석 주연의 ‘압꾸정’이라는 영화였다. 평이 좋은 영화는 아니었음에도 푹 빠져들었다. 영화 속 마동석의 사업 스타일은 흰 늑대와 비슷했다. 건들건들하며 강한 느낌이지만 나에게만은 형님 형님 하며 고개를 숙인다. 그는 기회를 잡아 인맥을 통해 이를 성장시킨다.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끌어와서 발휘할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이 영락없는 겹쳐 보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두 주인공이 나와 흰 늑대로 비유되어 보였다. 두 사람의 결말을 보며, 만약 우리가 같은 상황이라면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흰 늑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함께 할 마음의 결심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역시 나의 거절 이후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형님,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회사에 들어오셔서 형님 하고 싶은 거 하세요. 저는 사무실과 4대 보험만 제공하겠습니다. 출근도 편하게 하세요. 다만 가끔 저 혼자 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요청드리겠습니다. 정부 사업이나 같은 것들이나 프로젝트 관리 같은 것들이요. 그리고 제가 가진 다른 회사들도 활용하고 싶으면 말씀만 하세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흰 늑대는 자신의 회사에 나를 소속시키는 한편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했다. 심지어 원한다면 회사를 활용할 수도 있는 기회마저 주었다. 그렇게 흰 늑대의 회사는 나의 노마드 삶을 이어가기 위한 거점이자, 방향을 잡아주는 축이 되었다. 앞으로 나는 다양한 도전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중심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