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트라우마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 그리고 일면식도 없는 분들의 마녀 사냥 탓에 몇 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버티기) 이를 이겨내기 위해 정신과를 다니던 중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갑자기 지난 연애 이야기를 물으셨다. 헤어진 연인들 십여명에 대해 짧게 이야기했다. 나에게 연애의 바이블이었던 게임 이야기도 나왔다. (연애의 바이블) 그 안에서 선생님은 나의 연애 패턴을 찾아내셨다. 그동안 전혀 인지하지 못하던 부분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 동일했다.
보통은 상대가 먼저 나에게 호감을 느낀다. 못생기고 조건도 나쁜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얼까? 그녀에게는 결핍이 있다. 정신적으로 힘들 수도 있고 물리적인 상황이나 벗어나지 못한 과거, 이루지 못한 꿈이 있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그 무언가를 꺼내 놓으면서 고백을 한다. 나는 받아들인다. 마음을 전해준 것이 고마워서. 그리고 나 같은 놈을 좋아해 준 것이 특별해서.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연애가 시작된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그녀들은 결국 자신을 힘들게 하던 무언가로부터 벗어난다. 꿈을 이룰 수도 있고, 상황이 나아질 수도 있다. 혹은 오랫동안 마음에 있던 무언가를 털어낼 수도 있다. 극복을 통해 한 차례 성장하게 되며 다른 사람이 된다. 그날이 오면 상대는 마음속에서 서서히 나를 떠나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별을 하게 된다. 끝. 결국 나는 힘든 순간에 의지 되는 대상일 뿐이었던 것일까? 상관없다.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이 나와의 시간을 거치며 성장했다면 우리의 연애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닐 테니까.
연인에게 약한 모습이나 서툰 모습을 보이기 싫어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어야 할 존재, 누군가를 지켜주는 존재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쓸모가 없어질 테니까. 감기에 걸려 아프기만 해도 상대의 호감도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다 보니 힘든 티를 낼 수도 없다. 나는 슈퍼맨이어야 했다. 항상 의지가 되고 강한 행동력을 갖고 있어 기댈 수 있는 존재. 상대가 나에게서 바라는 부분이 그것이라면 충족시켜 주어야만 했다. 이 또한 책임에 대한 강박이었다. (책임감, 강박에서 욕망으로) 나는 버텨내는 사람이고 힘든 일은 이겨내는 강한 사람이어야 했다. 따라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때로는 약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다고, 자신에게 기대고 의지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행동을 했을 때 돌아오는 것은 상대의 실망이었고, 거기에서 이어지는 것은 이별뿐이었다. 연애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항상 무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20대 후반에 만났던 연인은 헤어질 때 이런 말을 했다. 오빠가 나를 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데리고 나가 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아닌 것 같아. 그랬다. 나는 무능했고, 그 탓에 이별당했다.
스스로 거리를 둔 1년간의 솔로 생활을 했다. (1년 간의 솔로 생활) 그다음 연애는 먼저 호감을 느껴보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이상형을 정해보기로. 그렇게 하면 호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 생기겠지?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만 나름의 전략이었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이상형은 ‘극복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기대지 않을 꽂꽂한 사람을 만나면 괜찮지 않을까? 이를 기준 삼아 연애를 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무언가를 극복한 뒤에는 더 큰 것이 다가오게 되는 것이 당연하니까.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인간은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상대에게 기대게 되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책임지는 삶을 살아왔다. 이것은 정체성으로 완전히 박혀버렸다. 그 탓에 연애 또한 책임이라고 여기게 된 것일까?
연애를 시작하는 조건은 흐릿하지만 거절하는 조건은 명확했다. 첫 번째는 게임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이다. 너무 당연하지? 게임은 나의 삶 그 자체니까. 두 번째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돈’에 둔 사람이다. 내 이야기를 따라온 분들이라면 그 이유 또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분들을 보면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라는 업) 따라서 나와 맞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탓에 첫 만남에 돈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는 바로 벽을 세우게 된다. 성별을 떠나서 말이다. 세 번째는 같은 업계 혹은 같은 직종인 사람이다. 통하는 것도 많고 좋은 부분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 반대 요소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단 한 번 게임 원화가와 연애를 했고 이별 이후로 확고 해졌다. 같은 분야라면 서로 경쟁하게 될 수도 있고 상대를 통한 시야의 확장도 좁을 수밖에 없다. 같은 세계에 몸담고 있으니까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단점에 더해 만약 이별까지 하게 된다면? 업계 인맥이 각각 절반으로 줄어들게 된다. 리스크가 크다. 그러니 피할 수밖에.
모든 연애의 끝은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내면적인 성장을 시켜주었다. 하지만 어떤 이별은 작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종종 떠오르는 한마디가 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극복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래서 연애를 시작했고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했다. 그동안 그녀에게는 새로운 목표와 꿈이 순차적으로 생겨났다. 이 하나하나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원하던 직업을 갖게 되었고 바라던 삶의 형태를 구축해 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녀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돈이 필요해진 것이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나는 조라 대표님의 회사를 나오게 되면서 수입이 없어진 상태가 되었다. (새벽의 노마드) 감사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힘들 때 도와준 만큼 힘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생활비를 빌려주거나 데이트 비용을 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힘들 때 서로 기대자는 말은 믿지 않는다. 상대가 기대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가 기대서는 안 된다. 몇 번이고 경험했으면서 같은 실수를 했다. 서서히 균열이 시작되는 도중 코로나까지 걸렸고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번에도 내가 무능해지자 당연한 듯 이별당한 셈이다.
많은 과거 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 역시 이별 후에도 친구로 지내기를 원했다. 몇 번은 따로 만나기도 하고 그녀의 일을 위한 시간을 확보해주기도 했다. 연인이 아니라도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일이었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간 날, 상영 시간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빠. 현실 감각 좀 가져.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역린이었다. 넌 돈이 그렇게 중요하니?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 싫어하는 걸 아니까 말 안 한 거야. 솔직히 사는 데 있어서 돈은 당연히 중요하지. 그러면서 그녀는 고향 친구의 이야기를 꺼냈다. 지방에서 호프 집을 인수해 큰돈을 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보기에 오빠는 누구보다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이야. 오빠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응. 고마워. 칭찬이 아니야. 내 친구처럼 노력을 안 해도 큰돈이 붙는 사람이 있는데, 오빠는 그러지 못하잖아. 노력하면 뭐 해? 결과가 없는데. 오빠를 보고 알았어.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는 거라는 걸. 잔인한 말이었다. 그래. 너는 다음에는 꼭 잘되는 사람을 만나. 상처받지 않은 척 적당히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오빠는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이야.’
노력이란 무엇일까?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노력에는 대부분 목표 지점이 있다. 결국 열심히 해도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말일까? 오래도록 생각했고 그 말이 내 안에 깊이 박혔다. 오랜 방황 끝에 결론을 냈다. 그저 목표가 달랐을 뿐이라고. 그녀가 보기에 안 되는 사람이라 함은 돈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내가 생각하는 노력의 끝에 돈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목표는 ‘게임의 진화’이다. 정확히는 ‘진화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맹세) 여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새로운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씨앗을 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차피 안 되는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노력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왜 살고 있는 걸까?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있나? 공기만 오염시키는 쓰레기가 아닐까? 몇 번이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다가 문득,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흔적을 남기자. 이를 본 세상의 누군가의 마음에 불씨가 생긴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의 노력에는 가치가 생긴다. 그렇게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고 SNS에 타임 테이블을 올리기 시작했다. 쓸모 없어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나의 쓸모를 알아달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셈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 대로 나는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평생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모든 시간이 의미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작은 영향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그녀가 남긴 말은 ‘어차피 나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형태로 마음에 박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여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전개되었다. 누군가가 영향을 받는다면, 나는 여전히 노력할 것이다. 내가 평생에 걸쳐 심은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는 모습을 누군가는 지켜볼 테니까. 부정적 의미의 트라우마라고 꼭 지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거기에서 뻗어 나오는 생각이 긍정적으로 반전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아마 나도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