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일 대로 꼬인 군 생활
가족 부양을 이유로 군 면제를 신청했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몸이 아프다고는 해도 어머니는 40대이셨고, 동생도 성인이었다. 실제 사정이 어떻든 외부에서 보기에 자격 요건에 충족되지 않는 것은 명백했다. 결국 우리 가족은 구미에 있는 외 할아버지의 공장 사택으로 들어갔다. 내가 군 복무를 하는 동안 동생과 어머니를 지켜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기에 외 할아버지에게 의지한 것이다. 대신 휴가를 자주 나올 수 있는 공군을 목표로 했다. 첫 시험에 떨어지고 두 번째 도전에 합격했다. 입대하는 날, 어머니와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가 배웅을 나왔다. 슈퍼 마켓 집 딸이었다. (양말 사세요.) 하지만 눈물의 이별이 허무하게 훈련소에서 2주 만에 퇴소당했다. 정신 이상 소견. 공군에서는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집에 돌아가니 어머니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처음으로 겪는 아들과의 이별이 힘드셨으리라. 여자 친구는 그 사이 다른 사람이 생겼다. 뭐 그럴 수 있지. 잠시 두어 달 대기하니 국방부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 시간에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번에는 육군이었다. 이 정도 정신적인 문제는 육군에서는 문제없다고 했다. 무서운 놈들. 공군 훈련소와는 달랐지만, 두 번째 입소한 훈련소는 나름 익숙했다. 언제 줄을 서야 하는지 언제 빠져야 하는지를 대충 알 것 같았다. 문제는 5주째 유격 훈련 중에 벌어졌다. 천식에 의한 호흡 곤란으로 쓰러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선천성 질병이라 치료가 불가능했다. 여담이지만 지금도 천식을 달고 살고 있다. 동기들이 전부 자대 배치를 받아 하나 둘 떠나는 동안 의무대 입원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후 국군 통합 병원으로 옮겨져서 며칠간 검사를 받았다. 기다림 끝에 면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를 위해 근처 종합 병원에서 검진을 받아 지정 기일까지 진단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들뜬 마음으로 두 번째 귀가를 했다.
두 번이나 군대에서 돌아온 아들을 본 어머니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번에는 무던했다. 역시 처음만 힘들었던 것일까? 검사를 받으며 면제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들떴지만, 세상 일이라는 것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의료 파업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진단서를 떼지 못했고 세 번째로 훈련소를 들어가게 되었다. 병무청을 찾아가서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번에 들어간 곳은 조금 달랐다. 다양한 부대에서 여러 이유로 쫓겨났다가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입소한 사람들과 함께였다. 개중에는 나이가 꽤 많은 분도 있었고 조직에 몸을 담고 있다며 문신을 잔뜩 한 분도 있었다. 몸에 맞는 군복이 없어서 교련복 같은 헐렁한 옷을 입고 훈련에 참가하는 거구의 남자도 있었다. 무슨 문제아 집단이냐. 이 구성이 꽤 마음에 들었다. 천식 기록이 남아 있었는지 화생방이나 유격 등 일부 호흡이 필요한 훈련에서 나는 열외였다. 대신 그 시간 동안 사무실에 있는 PC 업그레이드와 수리를 담당했다. 너 용산에서 컴퓨터 팔았댔지? 사업도 했다며? (ATDT01410-ATM0) 문제는 모든 훈련이 끝난 뒤였다. 나 하나만 자대 배치가 되지 않았다. 정신 이상 소견과 천식에 대한 국군 통합 병원의 기록으로 인해 문제가 있는 듯했다. 이번에도 의무 반 입원실에서 며칠을 대기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불려 나갔다.
너 컴퓨터 좀 하지? 부대에서도 컴퓨터 좀 고쳤다며? 교육청에서 프로젝트를 하는 게 있는데 거기 지원 좀 나가라. 그렇게 어영부영 가게 된 곳이 교육 행정 정보 시스템. 이른바 NEIS 지원 실이었다. 당시에 학생 인권 문제 등으로 이슈가 많이 되던 바로 그 시스템 개발팀이었던 것이다. 교육청 근무를 하던 중 홈페이지 제작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받았고 군대 정신에 입각해서 (사실은 못하지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결과 HTML과 플래시를 공부하며 과학 영재 교육 홈페이지 등 교육청의 다양한 서브 페이지 제작을 했다. 그 와중에 NEIS 개발이 완료되었고 부대로 복귀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각오하고 있었지만 돌아온 이야기는 의외였다. 아마 부대에서도 내 병력이 골치 아팠으리라.
내가 받은 지시는 일반적인 군복무와 달랐다. 경상북도 관내에 정보화가 되지 못한 학교들이 많이 있다. 그곳에 가서 컴퓨터 실을 만들어라. 전직 PC방 매니저였고 교육청에서 이런저런 PC관련 작업을 한 덕분인 것 같았다. (PC방 매니저의 긴긴밤) 시골에 있는 학교들로 파견되었는데, 교실 바닥을 들어내서 랜 선을 깔고 PC를 설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공사 업자 분들과 친해졌는데, 이는 이후 여러 공사판 일용직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잠은 학교 숙직실에서 자야 했다. 몇 시간씩 걸리는 부대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한 밤 중에 학교를 순찰하는 일은 오싹하고 즐거웠다. 예전 생각이 자주 났다. (나의 호러 연대기) 순찰 중, 아직 전기 공사가 되지 않은 컴퓨터 실에서 모니터 한 대가 켜져 있던 적이 있었다. 심지어 콘센트도 뽑혀 있었다. 뭐지? 귀신인가? 두근거렸다. 혹시나 싶어 모니터에 손을 대 보았다. 그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음날, 확인해 보았는데 모니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몇 개월간 시골 학교에 컴퓨터실을 만드는 일을 하는데, 어느 한 초등학교에서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교장 선생님이 나의 의향을 묻고는 교육청에 부탁해서 이 학교에 당분간 머물게 되었다. 그때부터 학교의 온갖 궂은일을 다 했다. 당시 학생 회장의 아버지가 건축 일을 하는 분이셨는데, 그분과 함께 양호실도 만들었고 학교 주차장도 만들었다. 물레방아와 연못도 조성했다. 덕분에 작은 건물도 지어볼 수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운동장의 모래를 새로 까는 일이었다. 거대한 차가 와서 운동장 한 켠의 모래를 쏟아두고 갔는데, 이 것을 삽 하나를 들고 운동장에 고르게 펴는 일이었다. 꼬박 2주 정도가 걸렸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회계 처리는 인부 30명을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비용이 어디로 갔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그제야 나의 가치를 깨달았다. 심지어 군인이기에 무료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가장 가깝게 지낸 것은 주사 아저씨였고, 그다음이 조리실 아주머니들이셨다. 주사 아저씨와는 학교 뒤 산을 돌아다니며 나무를 하기도 하고 겨울에 마른 장작을 모아 불을 붙여 쬐기도 했다. 화단을 관리하고 나무를 전지하고 낙엽을 쓰는 것도 모두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모르는 학교의 온갖 잡다한 일을 다 하는 분이셨다.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는 누가 거는지 아는가? 옥상 물탱크는? 교실 전등이나 화장실이 막히면? 연못에 있는 잉어에게 먹이는 누가 줄까? 한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나면 잠시 조리실에 가서 얼음물을 한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조리실 아주머니들은 다들 이 학교 학생의 부모님이라고 하셨다. 가까이에서 아이를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시골 학교인 만큼 대부분의 가정은 농사일을 했다. 덕분에 2년간 두 바퀴. 농사의 시작과 끝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매번 농사일을 도우러 나갔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교장 선생님의 지시였다. 일은 주사님과 내가 하는데 생색은 본인이 내셨다. 뭐 어쩔 수 없지. 이런 것이 권력이겠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벼를 베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막상 하려고 하면 아예 안 해본 사람보다는 잘하지 않을까? 언젠가 귀농하는 선택을 하게 되더라도 아주 약간은 자신이 있다.
언젠가부터 몸 쓰는 일에만 투입이 되다 보니 억울한 마음이 생겼다. 어느새 2년이 다 되어 가기에 계급은 상병이어야 하지만 혼자 근무하다 보니 주사 아저씨와 교장 선생님의 지시를 받아 몸 쓰는 막일을 할 뿐이었다. 영원한 졸병인 셈이다. 페인트 칠도하고 농사 지원도 나가고 교장 선생님 면 세우기 용으로 근처 기관에 가서 잔디를 갈아주기도 했다. 결국 참다못해 대구에 있는 지방 병무청으로 쳐들어 갔다. 부대로 복귀시켜 주시면 안 됩니까? 잠깐 파견 나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벌써 2년이 다 되어 갑니다. 알았다며 일단 근무지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연락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연락이 왔다. 현역에서 공익 근무로 변경된다는 통지서였다. 화가 차오르지만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지난 2년간 훈련 주기마다 서너 번 부대에 다녀온 것이 전부였고, 실 근무지는 교육청과 학교였으니까. 장점도 있긴 했다. 이제 학교 숙직실에서 잘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구미에 있는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것이 정식으로 허가되었다.
어느 날 선생님들이 나에게 컴퓨터 수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주셨다. NEIS 개발팀에 있었기 때문에 입력 중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매번 해결해 주었고 컴퓨터 실도 구축한 나름 전문가였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감사한 마음으로 전 학년 컴퓨터 수업을 담당했다. 그러던 중 학교가 방송실 구축 시범 사업에 선정되었고 이번에는 방송 장비를 공부했다. 누군가는 해야 했으니까. 이를 통해 방송반 아이들에게 방송 장비 사용 법을 알려주고 학교 교가 동영상을 함께 만들고 편집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방송반도 맡아 달라고 했다. 군인이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마지막은 방과 후 활동이었다. 내가 춤을 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선생님들 덕분에 힙합 댄스 부를 맡게 되었다. 여기에 나의 요청으로 컴퓨터 게임 제작반까지 개설했다.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이제부터 사복을 입고 다니라고 말했다. 집에 가서 옷도 좀 갈아입고 오세요. 선생님이 군복만 입고 숙직실에서만 지내는 것은 아이들 보기에도 안 좋습니다. 그렇게 나는 군인 주제에 마치 초등학교 교원인 것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제대를 두어 달 앞둔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나를 호출했다. 그리고 상상도 못 했던 제안을 했다. 우리 학교에 컴퓨터 잘하는 사람이 없는 거 알죠? NEIS도 잘 다루시고. 아이들도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교사로 추천을 할까 해요. 네? 그게 가능한가요? 교대를 나와서 시험을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교장 재량으로 임시 교사 추천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1년간 근무하면 정식 교사로 넣어볼 수 있어요. 안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글쎄요. 대신 저를 좀 도와주셔야 합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 컴퓨터를 잘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단박에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는 평생 춤만 출 수 있다면 게임을 포기해도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때마침 내가 쓴 인터넷 소설로 출판사에서 제안이 온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이 학교에는 댄스부도 있었고 게임 제작부도 있었다. 모든 것이 나를 유혹하는 듯했다. 평생 안정적인 교사 직업으로 갈 수 있는 길. 아주 조금만 양심을 버리면 된다. 게임은 취미로 하자. 춤을 추고 소설을 쓰면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 5학년 담임을 맡고 있던 선생님은 나의 좋은 상담자였다. 동생처럼 보였는지 자기 일처럼 이야기를 들어주었는데, 고민하지 말고 무조건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말하셨다. 하지만 그때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졌다. 5학년의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2학년 때부터 선생님 지갑에 손을 대던 아이였는데, 치밀하지 못한 것인지 매번 들켜서 혼이 났다. 이제 고학년이니까 한 번 더 걸리면 그때는 손바닥을 맞는 거야. 네 행동에 책임은 져야지. 마지막 도둑질이 들켰을 때, 선생님이 단단히 일렀지만 또다시 선생님 지갑을 훔치다가 걸린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의 손바닥을 때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이의 부모님이 기자를 데리고 찾아왔다. 그 선생님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 사건은 선생님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학교 전체에 충격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것이 교사 생활이라면, 비리를 도와야 하고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눈 감아야 한다면 자신이 없었다. 물론 그 상황에서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체벌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는 훌륭한 교사 분들도 있겠지. 하지만 나에게 교육은 그만큼의 사명감을 주는 분야가 아니었다.
군 복무가 끝나는 날. 조회가 있었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언젠가 먼 미래에 나를 찾아온다면 반갑게 맞아주겠다고. 나름 멋진 이별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아이들에게 그리 인상 깊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역시 교사 루트로 진입하지 않기를 잘했다. 나랑은 안 맞는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