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술자리를 피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한참 썸이 진행되다가도 상대가 술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면 거리를 두곤 한다. 취중 진담이라며 술에 취해서 고백해 오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말하기 위해 술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라면 간절함과 용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다 보니 불필요한 관계에 엮일 일도 없고 ‘술김에’라는 핑계를 댈 일도 없다. 아주 깔끔하고 좋다.
어릴 때부터 술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놀이터에 모여 술을 마시곤 했다. (중딩 누아르) 그 나이에 술맛을 알았던 것은 아니었겠지. 그저 어른 흉내를 내며 강해 보이고 싶어서였을 게다. 대학 시절에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특히 자취를 시작한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오늘 내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자. 이 한 마디면 친구들이 술과 안주와 라면 등을 사 왔다. (평화로운 대학생활) 술자리를 마치고 남은 음식은 전부 냉장고로 들어갔다. 덕분에 한동안 굶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소시지 하나로 일주일씩 나누어 먹던 시절이었으므로 소중한 식량 확보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좋아하는 음식은) 친구 들과의 술 파티를 그만두게 된 것은 피를 본 탓이다. 군대를 막 전역한 친구와 축하 파티 겸 술을 마시다가 서로 시비가 붙었다. 마! 내가 대한민국 육군 김병장이야! 이딴 소리를 하며 자기들끼리 치고 박았고 말리는 친구들까지 깨진 소주병에 찔리는 등 생각보다 큰 문제가 벌어졌다.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원인 제공자가 된 것 같아서 앞으로 술 파티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0대 초반. 한 번은 사귀던 여자 친구 때문에 취할 정도로 마실 일이 생겼다. 통화하던 중 그녀가 다른 남자와 모텔에 함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바람을 핀 것이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당당했다. 화가 나기보다는 내가 가난한 탓이라며 자책했다. 제대로 된 생일 선물 하나도 챙겨주지 못했으니까. 위로해 준답시고 지역 모임의 형 누나들이 술을 사주셨는데, 그 와중에 만취해서 펑펑 울다가 토하고 길거리의 간판에 주먹질을 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결국 안양 일번가 길바닥에 널브러진 채 잠이 들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누나 한 명이 곁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등을 두드려주고 위로해 준 누나는 이후 연인이 되었다. 나의 밑바닥을 보고도 혐오스러워하지 않아서 고마웠던 것 같다. 아무튼, 이 날 이후 술을 과하게 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얼마나 추한 모습이 되는지 스스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가끔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싶으면 혼자 모텔 방을 잡고 마셨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취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피할 수 없는 술자리가 있으니까. 그럴 때면 가급적 입을 닫았다. 술만 마시면 조용해지는 애가 되기로 했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술을 너무 좋아하는 형이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술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냥 당연히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다. 모두 저러다 큰일 날 거라고 말했으니까. 한동안 잊혔던 형이 떠오른 것은 과음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도중이었다. 90년대 2000년대 한국의 회식 술 문화는 끔찍했다.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먹이는 분위기였다. 나름의 꾀를 낸 것이 첫 회식 때 최대한 술을 많이 마셔서 정신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두 번 다시 술을 권하지 않았으니까. 그날도 의도적으로 술을 마신 상황이었지만, 갑자기 죽은 형이 떠오른 것이다. 이 짓도 그만둬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강권하는 술 문화가 많이 줄어들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안 좋은 이야기만 했지만, 모든 술자리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구미의 어느 포장마차에서 사촌 형인 백곰과의 술자리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대화 내용을 통해 배우고 깨달은 것이 많기도 했지만 오래전부터 존경하던 형과 둘 만의 자리라는 것이 특별했다. 포장마차 특유의 감성과 어우러진 분위기가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곰 세마리가 한 집에 있었어) '만약에' 회사의 술자리도 최고였다. 참여한 모든 멤버들에게 배울 점이 있었기 때문일까? 나보다 어리고 직급이 낮은 신입 사원에게서도 무언가를 뽑아내고 싶었다. 밤새 이어진 술자리에서도 취하지 않은 것은 아마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만약에) 게임 블로거들과의 술자리도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취미뿐만 아니라 일상과 아픔까지 공유하는 지인들과는 언제나 마음을 열 수 있으니까. 이처럼 종종 좋은 자리가 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공통점은 무언가를 배울 수 있거나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자리인 것 같다. 사실 술자리를 기피하게 된 것은 회사 문제가 컸다.
대기업인 N사의 신입 환영회는 끔찍했다. 10분을 줄 테니 우리 본부 사람들 이름을 모두 외워 오라는 미션이 내려졌다. 이름을 틀릴 때마다 소주를 한 잔씩 마셔야 했다. 수십 명을 갑자기 외우라니. 다 외웠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직책과 직무를 외우라는 두 번째 미션이 주어졌다. 그냥 술 먹이려는구나 싶었는데, 병원 실려가기 스킬을 쓰기도 애매했다. 어떻게 들어온 대기업인데, 술 못 마신다고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그렇다고 취하고 싶지는 않은데. 고통의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 준 것은 맹우 조 군이었다. (맹우) 역시 오타쿠는 세상을 구한다. 아닌가?
공장에서 일하면서, 그리고 그 이후 사업을 하면서도 가장 힘든 것이 접대 문화였다. 왜 접대는 항상 마지막에 술자리가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경우에는 버티는 것이 목적이 된다. 어떻게든 정신을 부여잡아야지 내가 먼저 취해서는 곤란하다. 상대를 케어해야 하니까. 따라서 접대 전에 슈크림을 먹고 중간중간 담배를 핑계로 나가서 술을 깨야 한다. (놀랍게도 나는 비흡연자이다.) 그래도 안 되겠으면 화장실에 가서 토해내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돌아간다. 술을 잘 먹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즐기자는 마인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고역이었고 점점 더 술을 싫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맥 관리를 위해서는 술을 마셔야 한다고들 한다. 나 역시 술자리로 얻은 인맥이 많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사업을 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등 돌리는 인맥은 대부분 술자리를 통해 친해진 분들이었다.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가벼운 사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술자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심지어 한번 시작하면 가볍게 끝이 나지도 않기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까지 한다. 취기가 올라서 로맨틱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정신이 멀쩡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말은 그리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정 반대다. 그럴듯한 거짓말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스트레스 해소가 된다고? 게임이나 운동을 하면 된다. 심지어 나는 맛치이기 때문에 술맛의 깊이를 느끼지도 못한다. 아무리 가까운 누군가에게라도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치욕스럽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세상이다. 이렇게 보면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지옥의 효율 충인 나에게 있어 술자리는 비효율의 극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