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을 함께한 게임 동아리
경상북도 구미의 어느 포장마차. 나와 백곰. 단 둘이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백곰의 의지였다. 너무 잘난 탓에 생긴 기묘한 고민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었어) 그러던 중 백곰이 나에게 물었다.
“대학 생활은 어때? 왠지 너는 다를 것 같은데.”
“다를 게 있나?”
“서울대는 다들 공부만 하거든. 서로 경쟁하는 느낌이야.”
“거긴 그렇겠지. 하지만 나도...”
나도 공부만 하지. 장학금 받아야 학교를 다닐 수 있잖아.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에 백곰이 말을 덧붙였다.
“넌 게임하는 사람이잖아.”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맞아. 그렇지. 나는 게임하는 사람이야. 게임의 핵심은 재미잖아? 그런데 공부만 하고 있다고? 나답지 않아. 게임 동아리라도 가입해서 활동해 볼까? 어쩌면 조군 같은 좋은 동료를 얻을지도 모르잖아? (맹우) 며칠 뒤, 학교에 가자마자 등록된 동아리 리스트를 확인했다. 게임 동아리는 없었다. 그나마 가까운 것이 애니메이션 동아리였지만, 중고등학교 때 재능의 한계를 느낀 만화에 대학 시절을 보내는 것은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룩백 온 기브업) 게임 동아리가 없다면? 그럼 그냥 만들자! 다음 날 학교 게시판에 게임 동아리 멤버 모집 공지를 올렸다. 총 6장의 공고문을 썼는데, 각 공고문마다 다른 컬러의 드래곤을 그렸다. 가입 희망자는 X월 X일 X시. XXX 강의실에서 모여달라고 썼다.
드디어 D-Day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까?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실에서 사람들을 기다렸다. 모인 것은 고작 4명뿐이었다. 누가 봐도 너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 중 한 명은 그냥 친구 따라서 구경 왔다고 했다. 나를 포함해서 총 5명이었다. 상상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 적은 인원이었지만 동아리 설립을 위한 최소 발기인이 딱 5명이었다. 구경 온 친구만 꼬시면 바로 동아리 신청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게임 동아리 설립 취지를 이야기하고 열심히 꼬시는데 어쩐지 다들 지루해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 필살기가 나가야지.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간단하게 게임 한판 하고 가시죠. 게임? 여기에서요? 게임기도 없고 모니터도 없는데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던전 앤 드래곤즈 TRPG 세트를 꺼냈다.
그리고 세 시간 후, 4명의 남자들은 던전 안에서 사악한 마법사를 물리쳤다. 구경 온 친구가 집중을 못하길래 시나리오를 살짝 바꿔서 그를 모두의 구원자 포지션으로 만들었다. 역시 본인이 영웅이 되자 흥미가 생기는 것 같았다. 이들의 첫 TRPG 체험이 끝나고 다시 물었다. 우리 동아리 같이 하자. 오늘 같은 체험을 매일 할 수 있어! 이렇게 다섯 명의 발기인이 모여서 게임 동아리 ‘레벨 1’이 탄생했다. TRPG로 꼬드긴 만큼 동아리 활동의 상당히 높은 비중이 TRPG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말 수 없이 많은 밤을 TRPG를 하며 지새웠다. 던전 앤 드래곤즈로 시작했지만, 주로 소드 월드를 많이 했고 다른 TRPG도 여러 종류를 즐겼다. TRPG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멤버를 모으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모두가 플레이어이자 마스터였기 때문에 멤버가 넘쳐났다. 덕분에 대학 시절 동안 원 없이 TRPG를 즐길 수 있었다.
동아리 멤버 중 아주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가게 되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TS라고 하자. 그리스 조각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그는 너드 성향이 강한 동아리 멤버들 중에서도 독특한 면이 있었는데, 그 탓에 가입 초기에는 다른 멤버들이 거리를 두었다. 동아리 회장으로서 이런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TS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을 모집해서 긴급 지령을 내렸다. 하루에 하나씩 TS를 위한 일을 하기. 말을 걸어도 좋고 밥을 사줘도 좋다. 그를 위한 마니또가 되는 것이다. 다행히 TS는 가까워지면 좋은 녀석이었고, 멤버들은 이를 알아주었다. 시간이 지나며 결국 그는 핵심 멤버가 되었다. 분명히 비밀로 하자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TS도 들었다고 했다. 이후 TS는 N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개발 지원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나마 게임 업계로 가게 된 것은 우리 둘 뿐이었다.
게임 동아리 멤버들은 당연히 모두 오타쿠였다. 밤늦게 함께 귀가하며 큰 소리로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합창하기도 했다. 한 번은 자취하는 멤버의 집에 몰려가서 기동전사 건담 08소대 등을 정주행 했다. 동아리 MT때에는 단체로 모텔에 가서 밤새 게임을 했다. 세가 새턴과 멀티탭을 들고 가서 여럿이 가디언 히어로즈나 봄버맨 등을 하며 밤을 지새웠다. 너무 놀기만 하는 것 같아서 ‘게임 대학’ 같은 책으로 게임 인문학 스터디를 진행하기도 했다. 대학 축제 때는 게임 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용산 총판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우승 상품을 저렴하게 제공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신입생이 들어오면서 동아리는 점점 커져갔다. 회지를 내기도 하고 TRPG 체험회를 하기도 했다. 한 가지만 빼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우리 동아리에 유일하게 단 한 가지는 여성 멤버였다. 어째서인지 여성 멤버가 들어오면 오래지 않아 탈퇴 신청을 했다.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감이 오겠지?
적극적인 활동이 인정받게 되며 학교에서 동아리 방을 제공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나의 생활도 안정되었다. 그전까지는 학교 랩실이나 도서관에 숨어서 잠을 자기도 했는데, 이제 당당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스티로폼과 종이 박스를 깔고 자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경비 아저씨와 숨바꼭질을 할 필요는 없어졌으니까. 그리고 먼 훗날 알게 되었다. 레벨 1의 동아리방이 생긴 이후, 기숙사의 유령 소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평화로운 대학생활)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동아리 건물의 유령 소문이 돌이 시작했다. 이번에도 실험 가운을 입고 새벽에 돌아다니는 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게임 개발이었다. 2학년 즈음부터 동아리 멤버들에게 함께 게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백설공주’를 소재로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기획을 진행했다. 프로그램은 컴퓨터 공학과 멤버들이 진행하기로 했다. TS군을 비롯해서 디자인 능력이 있는 멤버들은 그래픽 리소스라는 명목으로 여러 그림을 그렸다. 게임 스쿨을 다니며 아래층 개발 실에서 나름 게임 개발에 참여했다는 명예(?)로 내가 전체 디렉팅을 하기로 했다. 동아리 회장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자 프로젝트는 흐지부지 되었다.
방학 동안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혼자서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평소 좋아하던 도키메키 메모리얼 시스템을 가져오고 거기에 동급생에서 나오는 시간 관리 맵 탐색을 섞었다. (첫 키스는 브라운관 맛) 이후 등장 캐릭터들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래픽은 직접 손으로 하나하나 그렸고 다른 게임의 리소스를 허락 없이 복사해 와서 붙이기도 했다. 그렇게 방학 동안 조잡한 게임이 하나 완성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만큼은 특별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완성한 게임이었으니까. 다만, 누군가에게 보여줄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이 게임을 공개하게 되지만 그것은 다른 글에서의 이야기이다. (ATDT01410-ATM0)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군 복무. 당연히 나도 다녀와야 했는데, 문제는 동아리였다. 내가 없는 동안 다들 열심히 활동을 할까? 후배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녀석을 2대 회장으로 올렸다. 게임 복사 CD를 파는 부업을 하는 후배였다. 조금 찝찝했지만, 그래도 좋은 녀석이었으니까. 내가 만들고 성장시키며 애착을 갖게 된 이곳을 잘 관리해 주리라 믿었다. 그렇게 나는 떠나갔다.
몇 년 뒤, 복학하자마자 레벨 1 동아리 실을 찾았다. 게임 동아리는 여전히 건재했지만, 2대 회장도 군대를 가고 전혀 모르는 후배가 새로운 동아리 회장이 되어있었다. 게임 동아리, 레벨 1의 활동은 예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TRPG를 하지도 않았고 밤새 보드게임을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게임을 만드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아니었다. 회원들끼리 PC방에 몰려가서 게임을 하는 것이 활동의 전부였다. 레벨 1은 직접 만들고 성장시킨 조직이기에 나름의 애착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조직으로 느껴졌다. 더 이상 나의 레벨 1이 아니었다. 씁쓸하기보다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무언가의 속성이 달라지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