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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토리 Nov 17. 2023

프롤로그

어쩌다 나는 여기 살고 있는 걸까

오후 네시.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날씨앱을 열어보니 해 지는 시작이 오후 4시 9분이란다.

어제보다 1분 빨라졌군.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 동지라 했지? 올해는 동지가 언제야?

12월 22일이구나.

앞으로 한 달도 더 남았네. 동짓날엔 세시 반이면 어두워지겠네.

하… 밤이 너무 길다…


삿포로에 온 지 145일째다.

애들 얼추 키워놓고 재미 삼아 시작한 일본어 공부가 여기까지 흘러올 줄 누가 알았을까.

그저 일본여행 가면 메뉴라도 읽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그걸 계기로 방송대 일본학과를 가게 되고 유학비자를 받아 삿포로에 어학연수를 오게 됐다.


졸업하면 어학연수 보내줄게.


흘리듯 말을 던진 남편은 약속을 지켰고 덕분에 나는 쉰 살이 넘은 나이에 가족도 없이 혼자 삿포로에서 일년살이를 하고 있다.

딸, 아내, 며느리, 엄마…

다 내려놓고 나 하나만 생각하며 살다 오라는 남편의 통 큰 선물이었다.


좋냐고?

안 좋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전업주부로 20년이 넘도록 살림과 육아만 해왔는데 밥도 안 하고 청소도 안 하고 빨래도 안 하고 내키는 대로 살고 있으니 안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다 좋지는 않다.

혼자 살고 싶어서 왔는데 거꾸로 왜 혼자서는 못 살겠는지를 깨닫고 있는 중이랄까.

어쩌면 죽을 때까지 부대끼며 잘 살기 위한 남편의 큰 그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벌써 나의 일년살이 중 삼분의 일이 지나갔다.

평생 다시없을 이 기회를 의미 없이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글을 쓴다.

내 생활과 주변을 좀 더 애정 어린 눈으로 살피고 기록하고 싶어서.




삿포로에 갈까요 멍을 덮으러, 열을 덮으러 삿포로에 가서 쏟아지는 눈발을 보며 술을 마실까요. 술을 마시러 갈 땐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거에요. 전나무에서 떨어지는 눈폭탄도 맞으면서요.

동물의 발자국을 따라 조금만 가다가 조금만 환해지는 거에요. 하루에 일 미터의 눈이 내리고 천일 동안 천 미터의 눈이 쌓여도 우리는 가만히 부둥켜안고 있을까요.

미끄러지는 거에요. 눈이 내리는 날에만 바깥으로 나가요. 하고 싶은 것들을 묶어두면 안 되겠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절망한 것을 사과한 일도 없으며, 세상 모두가 흰색이니 의심도 서로 없겠죠. 우리가 선명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 모호해지기 위해서라도 삿포로는 딱이네요.

당신의 많은 부분들 한숨을 내쉬지 않고는 열거할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부분들까지도 당신은 단 하나인데 나는 여럿이어서, 당신은 죄가 없고 나는 죄가 여럿인 것까지도 눈 속에 단단히 파묻고 오겠습니다.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병률 여행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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