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 수다가 떨고 싶어서…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굳이 크게 둘로 나누자면 속으로 잠수하는 유형과 밖으로 발산하는 유형으로 나눌 수 있겠다.
남편은 전자, 나는 후자다.
남편은 고민거리가 있거나 기분이 나쁘면 혼자 방에 틀어박혀 아무 말 없이 머릿속을 정리한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서 내 고민과 분노를 터뜨리며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신혼 때 부부싸움을 하면 실제 싸운 이유보다 이렇게 다른 성향 때문에 더 크게 부딪치곤 했다.
나는 남편을 붙들고 대화하자며 감정을 터뜨리려 하고 남편은 그런 나를 피해 입 다물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살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이해라기보다는 포기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미리 상대를 파악해서 싸울 거리를 안 만드는 방식으로 진화하긴 했다.
다행히 남편과 사이가 좋아 지금은 서로 속을 다 다 터놓고 얘기하는 제일 친한 사이지만 남편에게도 차마 꺼내지 못하는 속내는 있기 마련이다.
시집식구 흉은 아무에게나 볼 수 있다.
동네 친구에게나 애들 친구 엄마에게나, 심지어 이러저러하게 꾸려진 다양한 모임에서도 드러내고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오히려 며느리들 사이에서는 커다란 흉이건 자잘한 흠이건 시집살이의 고충을 드러내면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는 일도 있다.
서로 경쟁하듯이 시집살이의 서러움을 꺼내놓다 보면 은근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구만 하는 기분으로 바뀔 때가 많다.
친정식구 흉볼 때는 어릴 적 친구가 딱이다.
중학교 때부터 삼십 년이 넘게 알고 지낸 내 친구들은 어릴 적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서 울 엄마 아버지 내 동생 흉을 직살나게 보더라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해 준다.
어이구, 엄마도 늙으셨네. 옛날에 운동회 때 느네 엄마가 일케 일케 했었던 거 기억나냐? 그때 너 그래서 우리가 이랬자나.
너 울 아부지 알지? 울 아부지는 오십년 동안 그래. 니가 내 앞에서 그거 힘들다 하면 안 되지~
걔가 그랬다고? 그 시키 그 땅콩만 하던 게 나이 먹었다고 미쳤나부다!
그랬지… 옛날엔 그랬지 이러다 보면 별다른 해결책도 없이 슬그머니 감정이 정화된다.
어릴 적 친구는 이래서 좋다.
남편 흉도 그렇다.
아이고, 석 달도 필요 없어, 사흘만 같이 살아봐요 그런 소리 나오나… 하면서 남편을 천하의 웬수덩어리를 만들어 놓아도 사실 별 타격이 없다.
사네 못 사네 하더니만 꾸역꾸역 산다고 뒤에서 욕을 해도 상관없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고 부부 사이는 둘만 알 수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방패처럼 두르고 뻔뻔해지면 된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편히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자식 이야기…
시집식구건 친정식구건 남편이건 내가 여기저기 흘려놓은 못난 감정들에 대한 비난과 욕은 내게 돌아오니 감당할 수 있다. 내가 싼 똥, 내가 치우면 된다.
자식 일은 다르다. 자랑이든 흉이든 어디 가서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자랑이 질투가 되어서 자식 발목을 잡을 수도 있고 작은 허물은 쓰나미처럼 부풀려져 자식 앞날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물론 반대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뭐가 됐든 내 입에서 나온 말의 결과가 내가 아닌 자식에게 씌워진다는 건 똑같다.
나는 딸만 둘.
딸들이 자라면서 남편과도 나눌 수 없는 이야기들도 생긴다.
같은 여자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감정도 있고 아빠에게 비밀로 하며 여자 셋이서만 즐기는 것들도 생긴다.
투닥투닥 싸우면서도 두 딸이 지들끼리만 꽁꽁 감추는 것도 생기고 둘이 합심해서 나를 몰아갈 때도 있다. 어쩔 땐 얄밉기도 하지만 부럽기도 하다.
나도 자매가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살기 시작한 지 5개월째.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식구들에 대한 걱정거리 고민거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까이 있지 않은 탓에 나는 더 깊고 진하게 고민하는 것 같다.
수다 떨며 털어놓을 친구가 없는 것도 내가 쉽게 걱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다.
이럴 때 내게 언니가 있었으면, 여동생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낮이건 오밤중이건 아무 때나 전화해서 무슨 얘기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부모를 공유하니 엄마 아부지 얘기도 편히 할 수 있고, 서로의 남편이나 시집 얘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식 얘기도 남이 아닌 이모니까 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홋카이도의 긴긴밤, 혼자 있다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풀어놓을 곳을 못 찾은 생각뭉치들은 자꾸 덩치를 부풀린다.
부모에게도 남편에게도 자식에게도 친구에게도 꺼내지지 않는 내 안의 감정들을 어딘가 털어놓고 싶어 없는 자매를 찾는다.
애초에 없는 자매를 어디서 찾나, 여기다 끄적끄적 풀어놓을 수밖에…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