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홈커밍 데이
25년 11월 03일 아침 06시 49분
아침온도 6도. 11월이라고 알려주듯 아침 기온이 10월과는 다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경량 패딩을 입는 것도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꺼내 입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정말 계절 바뀌는 것처럼 꾸준한 게 없다. 존경합니다. 이런 꾸준함.
1일 내가 제일 기다리는 외부 행사를 참석하고 왔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항상 나는 이 날을 기다린다. 오랜만에 학교에 가서 선후배님들을 뵙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이날을. 물론 교수님도 뵐 수 있어서 좋다.
항상 가족이 함께 참여했는데 올해는 아내가 빠진 3인 체제로 참석했다. 우리 가족을 아는 동문들은 집사람은 어디 갔냐며 안부를 묻곤 하셨다. ‘아르바이트 갔다며’ 아쉬움 표정과 함께 대답을 여러 번 했다.
매번 동문회를 갈 때 오늘은 누가 올까 기대를 하며 간다. 매번 오시는 형님들이 또 오시는지? 새로운 졸업생 후배가 올런지 등. 학부생들이야 매번 봐도 새로워서~. 이번에는 작년과 다르게 ‘우리 조’ 학부생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아쉽다. 이건 다 02학번 W의 참석 때문에 그럴 것이다.
홈커밍 데이 진행 팸플릿에 참석자 명단이 있었다. 학번별로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는데 후배들 학번 중에 반가운 이름이 보였다. “W가 왔다고?” 내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보이지 않아 이름만 올려놓은 건가? 생각했는데, 각 조별 인원 발표가 있을 때 W를 보았다. 졸업하고 처음 보니까 거의 20년 넘어서 대면하게 되었다. 신입생 때의 샤프함은 없어지고 40대 아저씨 다운 후덕한 몸으로 변해 있는 W를 볼 수 있었다. W가 인사할 때 난 혼자서 환호와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조별 게임을 하면서 우리는 야외에서 다시 조우했다. 큰 소리로 반갑다를 연거푸 외치고, 악수를 하고, 그동안 어찌 지냈냐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마침 옆에 있던 아이들을 인사시키고, 난 두 아이의 아빠임을 자연스럽게 알려주었다. 우린 조별 게임을 잠시 이탈해서 학교 벤치에 앉아 근황과 옛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마침 학교 주변에 살고 있던 W동기 Y도 학교에 도착해서 세 명이서 오랜만에 이야기 꽃을 피웠다.
W는 나와 200m 거리도 되지 않는 곳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도 지나다니며 마주치지 않았다니.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이제라도 자주 보자며 연락처를 교환하고 나는 어디쯤 사는지 위치를 알려주었다. 다음에 집 앞 막걸리 골목에서 한잔하자고 약속을 했다. 야외 게임을 마치고 체육관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맥주와 안주를 챙겨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다. 우리 셋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재수생들이었다는 거다. 내가 02년도 학생회를 할 때 02 신입생을 받았는데, 그때도 제일 먼저 신입생들을 보고 물은 게 재수생들이 누군지 확인하는 거였다. 같은 과정을 겪어 온 친구들이라 마음이 더 쓰였고, 다른 신입생들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서 인지 더 빨리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각자 추억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부분을 W가 말해서 내가 그랬었냐고 몇 번이고 되물었고, 잊어버린 추억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기억들이 떠올라 새삼 기억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다른 선후배들 궁금해할 때면 마침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근황을 공유도 해주고, 통화도 가능한 친구들은 전화 연결도 하며 오랜만의 옛 추억의 네트워크를 복원하는 작업을 했다.
W와 이렇게 시간을 보낸 동안 조별 게임이 펼쳐져서 선의의 경쟁을 하자 다짐하며, 각자의 조별 모임자리로 헤어졌다.
홈커밍에 오면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어 언제나 오기 전에는 설레곤 한다. 홈커밍은 나에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1년 중의 행사이다. 이제 이 행사가 마무리되었으니,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
W를 봐서 반가웠지만 오랜만에 뵙는 형님들도 반가웠다. 형님들 주변에 앉아 근황도 이야기하고 요즘 경기도 이야기하며, 그리고 심부름도 하며 정다운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형들의 심부름을 하니 학부생 때의 내 모습이 생각이 나고 형님들도 그런 생각이 났는지 맥주와 마른안주를 들고 오는 나에게 미안함 표정으로 반겨주었다. 그러면서 묻는 한마디는 “올해 너 몇이지?” “형님 저도 이제 곧 50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심부름하니 좋습니다.” 라며 웃으며 대답했다. 서른과 마흔이 아닌 이제 오십을 바라보다니. 평생 안 늙을 줄 알았는데, 가랑비에 옷 젖든 이렇게 나이가 먹어 가고 있을 줄이야. 형들은 벌써 50을 넘겼고, 우와 대단들 하시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존경하는 마음이 한 뼘은 더 커지는 하루였다.
홈커밍 행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저녁 식사 시간. 이때는 신 교수님의 퇴임연을 함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35년간의 교수님 생활을 마치고 내년 2월이면 정년퇴임을 하신다고 했다. 내가 신입생 때 교수님을 처음 뵈었는데, 퇴임이라니.
1학년 전산수업을 하면서 컴퓨터랑 더욱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해 주셨고, 2학년 비주얼 베이직을 배우며 한때 프로그램 개발자를 꿈꾸게 해 주셨다. 3학년 때 계량분석을 수학(修學)하며 나도 수학(數學)을 아주 못하지 않는구나를 깨우치게 해 주셨던 교수님.
언제나 깔끔하고 세련된 복장, 그리고 화려한 언변은 너무 따라 하고 싶은 ‘롤모델’ 같은 분이셨다. 늘 패션 테러리스트 다운 복장과 거친 언변을 하는 나와는 정말 다르셨으니.
이런 나의 존경하는 교수님이 퇴임을 맞으신다고 한다. 이제 내가 학부생 때 지도하시던 교수님은 2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 또한 세월이 흘러감을 보여주는 일들일 것이다.
퇴임연에 참석한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애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돌아와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교수님이 여러 자리를 방문하시더니,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에도 오셨다. 아들보고는 몇 학번이냐 물으셨고, 중학생이고 제 아들이라고 알려드렸다. 우리 집 아이들을 처음 보시는 터라 조금 놀라는 눈치셨고, 아빠랑 똑같이 생겼다며, 덕담(?)을 건네주셨다. 우리 자리에 올 때 교수님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셨다. 벌써 졸업한 지가 수십 년이고 못 뵌 지도 그 세월과 비슷한데. 교수님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때 또 한 번의 감동이 밀려왔고, 너무나 감사했다. 수많은 제자들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교수님. 역시 존경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으시다.
교수님은 저번주부터 갑자기 몸이 좋아지지 않아 응급실을 다녀오셨다며, 이 좋은 자리에 술 한잔 기울이지 못해 아쉽다는 말씀을 하셨고, 요즘 근황은 어떤지 그리고 교수님 전문 분야이신 IT 업계 동향을 이야기하시면서 오랜만에 교수님의 짧은 강의를 청취할 수 있었다. 오늘이 아니면 이제 교수님 뵐 일이 자주 없을 것 같아 아쉬웠다. 원래 신 교수님은 학과 행사에 참석을 하셔도 짧게 하시고 자리를 떠나시는 일들이 많으셔서 학부생 때도 교수님과의 추억은 수업시간 말고는 잘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교수님과 마지막일 수도 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했고 감사했다.
항상 건강하시고, 시간이 허락되면 홈커밍데이에 종종 방문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교수님을 좋아하는 제자가 이렇게 간절히 원해 봅니다.
이렇게 교수님과의 짧은 시간 만남을 뒤로하며 나의 홈커밍데이 일정을 마무리를 지었다. 다음날 가족 행사가 있고, 집사람의 부재로 더 늦게 까지 아이들과 보내기에는 무리가 있어, 처음으로 홈커밍데이를 하면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아쉬움을 가득 남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형들과 동생들과 학부생들과 맥주 한잔씩 하며 더 정다운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데. 이 아쉬움을 남기고. 내년에 이 아쉬움을 불쏘시개 삼아 더욱 재미나게 놀아 보리라.
참 이번에도 경품행사가 있었는데 당첨이 되지 않았다. 우리 집 막내는 또 화를 내며 내 번호 주면 숫자가 호명되지도 않았다고 집행부를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