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XXX입니다.
25년 9월 22일 아침 06시 09분
주말을 보내고 새로 맞이하는 월요일 아침이다. 누군가 그랬던가? 저녁엔 자고 주말에는 푹 쉬라고. 그래서 주말에는 글도 안 쓰고 푹 쉬었다. 주말을 살짝 갈무리하자면 토요일 아침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내가 참여하고 있는 모임의 역사기행에 참가했다. 소록도 및 고흥을 방문했는데, 그동안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알 수 있는 하루였고, 그 몰랐던 사실들로 인해서 무지에 대해 부끄러웠고, 혼자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가지만 나 자신도 대단히 편협한 사람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되어 또 한 부끄러웠다.
그럼 이제부터 88년도부터의 나의 주변인물인 동네 형님들과 동생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난 88년 5월 군산으로 이사 왔다. 일요일 아침 짐을 이삿짐 차량에 옮기고 5시간 정도 움직여 군산에 도착했다. 우리는 5 가족이었는데, 트럭에는 다들 아 시다시피 운전석 외 조수석의 자리가 있다. 5명이 타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때 우리는 어렸고, 작아서 5명 모두 조수석에서 끼어 앉아 군산으로 갔다. 그때는 안전벨트 개념도 잘 없었던 때라 모두 안전벨트도 하지 않았고, 난 조수석 의자와 밑의 공간을 번갈아 가면서 이동을 했다. 내 기억으로 3시쯤 군산에 도착했던 거 같다. 우리가 이사 온다고 하여 새로 지어진 집이라 했다. 군산에는 둘째 이모가 살고 계셨는데 바로 둘째 이모네 앞의 옆집(왼쪽)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집은 기존에는 밭이었고, 우리의 이사를 알고 이모님이 집주인 사장님에게 부탁? 해서 지은 집이라 했다. (새집이고 아무도 살지 않았던 탓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사태가 일어나 부모님을 제외하고 우리 3남매는 모두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군산에 왔을 때 처음 느낌은 부산보다는 그냥 시골이구나, 여기서는 뭐 대단한 게 없을 거 같네 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고, 나름 제2의 도시 부산에서 왔는데, 도시 놈이 이제 촌놈이 되려 나 했다. 군산에 와서 제일 먼저 만나야 했던 화장실은 정말 시골의 화장실처럼 느껴졌고, 그곳에 가기가 웬 지 싫었지만, 몸에서 밀어내는 그 녀석을 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기 싫어도 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곳을 가기 싫어했던 이유는 단 하나. 부산에서는 그래도 시멘트 바닥이었는데, 여기는 나무판자여서, 혹시나 나무가 부러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나의 편안하고 아늑해야 했던 자연과의 만남을 방해해서 더욱 싫어했었다. 화장실과의 적응으로 무난히 아침마다 그곳에 들러 볼일을 해결하고 학교에 등교할 수 있었다. 집 앞을 나오면 조그만 개울? 이 흘렀고, 주변에 자그마한 논들이 펼쳐졌었다. 그리고 큰길의 왼쪽을 따라 100미터정도 걸으면 길 오른쪽에 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 학교와 집과의 거리가 불과 5분도 안 되었다. 부산에서는 학교가 저 멀리 조그맣게 보였고, 그걸 걸어가려면 최소 20~30분 이상이 걸렸던 기억이 나는데, 여기는 바로 큰길에 나가면 학교가 보이고, 걸어가도 5분 안팎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마음만 먹으면 3분 안에도 뛰어갈 수 있는 거리. 나의 등교 생활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가끔 도시락을 안 싸가서 점심을 먹어야 할 경우에는 집에 와서 라면을 끓여 먹고 가기도 할 정도였으니, 학교와 집이 가까운 건 크나큰 복이었다. 지금도 회사와 집이 가까운 건 큰 복이라 생각한다. (이런 거 때문에 서울 집값이 비싼 게 아닐까?)
학교에 첫 등교하던 날, 그날은 5월 9일(월요일) 토요일 4교시를 부산에서 마치고, 일요일에 이사를 하고, 바로 다음날 전학까지. 우리 부모님도 자식들 교육열은 높으셨던 거 같다. 하루라도 결석하면 불이익을 받을까 하루도 허투루 보내게 하지 않고(전학 오는 친구들에게 물으면 하루이틀 놀다가 왔다고 하는 친구도 있어서, 나도 내심 기대를…) 바로 학교에 등교할 수 있게 우리는 데리고 교무실로 입장하시었다. 그날은 체육대회를 하고 있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축하는 자리. 운동회 같으면 청군백군 나뉘어서 경기를 했을 테지만, 이 날은 운동회는 아니어서 팀 구성이 청군백군으로 이원화되지는 않았고, 대신 처음 듣는 구성으로 팀의 구성되어, 아 시골이어서 이런 구성인가 생각했다.(나중 나도 이 팀에 구성원으로 자연스럽게 활동을 하게 되었다). 팀 구성은 어버이날에 힌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모두 동네가 함께 즐기는 자리였고, 각자의 동네 구성원들로 팀을 이루는 형태였다. 그건 바로 ‘통’ 별 팀 구성, 즉 지금 학교에서는 ‘통 대항’ 여러 운동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 집 주소는 5 통이었고, 나는 가입의사 및 승인 등도 필요 없이 바로 5통 소속의 선수 및 일원이 되었다. 요즘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통별’ 구조라니. 지금으로 보면 아파트 동별 아니면 라인별 구성이라고 해야 하나. 새로운 이 지역만의 팀 구성이 여기가 부산과는 다르다는 걸 또 느끼면서, 시골에 왔음을 조금씩 머리에 세뇌시켰던 것 같다. (지금 난 군산이 시골이라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 집의 K가 군산을 시골이라 하면 시골 아니라고, 인구가 몇 만이고 어쩌고 저쩌고 장황하게 말을 하는데, 여기서부터 시골사람 티가 나는 거 같기도 하다. 누가 그 동네 사람이 얼마인지 알고 다닌 단 말인가, 대학 다니면서 타지에서 온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나와 같이 대도시가 아닌 소도시 및 읍, 면 단위에서 온 친구들은 기가 막히게 자기네 동네 인구가 얼마며 우리가 더 크다작다를 이야기했었다. 신기해 시골사람들만 아는 건가? 대도시는 인구가 얼마인지 관심이 덜 한 건가? 주변에 물어보시라 동네(구 또는 동)에 인구가 얼마인지 아시는지? 아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시골에서 왔을 가능성이 좀 놓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 경험상. 꼭 그 경험이 맞는 건 아니니. 참고만 해주세요. (정치인 제외)
학교 행사 중이라 수업에 참여할 수는 없었고, 운동장 주변을 교감선생님과 한 바퀴 돌며 일종의 투어를 했고,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10일부터는 첫 정상 등교하는 날. 어떠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이사 온 집은 우리 포함 3 가족이 살고 있었다. 우리 집 맞은편으로 기다란 주택이 있었고 이 주택은 3개로 분할되어 쓰이고 있었다. 우리 집 기준으로 맞은편 가장 오른쪽은 우리보다 어린 동생들이 살고 있는 가족이었고, 여기는 4 가족의 집이었다. 그리고 가운데는 집주인, 가장 왼쪽 단칸방은 비어 있었는데, 가끔씩 동네 대학교 형들이 여기를 자취방으로 쓰곤 했다. 그래서 가끔은 형들이 밤마다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잘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주인집은 이 건물의 가운데를 사용했었고, 그곳은 방 2개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부엌이 나오고, 부엌을 지나 들어가면 큰방, 큰방 오른쪽 모서리에 작은방과 연결되는 문이 있었던 흔적의 네모난 구멍이 있었고, 이곳을 통하면 작은방으로 연결이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주인집 구조를 잘 아냐고? 놀러도 자주 갔지만, 1년이 지나고 우리는 여기로 이사 오게 된다. 그래서 구조가 익숙하다. 1년이 지나고 집주인 어르신께서는 새 집을 우리에게 준 게 아무래도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집주인이 헌 집을 쓰고, 세입자가 새집에 들어온다는 게 아무래도 좀 이상하기도 했을 것이고, 주변의 수군거림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린 1년 후 여기로 이사 온 게 아닌가 혼자 소설을 써본다.
집주인 댁에도 애들이 2명 있었다. 나를 기준으로 1살 위 누나 H, 2살 아래 동생 J. 이 두 남매 와도 사이좋게, 응팔에 나오는 그런 풍경을 같이 공유했었다. (그땐 참 그랬는데. 요즘은 어쩌다 그런 풍경들이 많이 사라졌는지. 다 우리의 잘못일 것이다.) J는 동네 동생이기도 하고 5통 선수이기도 해서 우리는 서로 ‘통 대항’ 달리기 경주 때마다, ‘통’을 대표해서 열심히 뛰었다. 이런 ‘통’ 문화가 있어서 그런지 동네 놀이나 움직임의 공간 범위는 ‘통’을 벗어나지 않고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통’ 별로 구분되는 문화들이 있어 통별로 비교를 많이 했던 거 같다. 니네 통에서 누가 공부 제일 잘하냐, 니네 통에서 누가 싸움을 잘하냐 등. 뭐든 기준은 우리 사이에 ‘통’ 이였다. (난 지금 몇 통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주소에 어느 날부터 통을 기입하지 않았다. 번지수까지만 기입했고, 요즘은 도로명 주소다 보니, 더욱 ‘통’이란 단어가 쓸 일이 없다. 통장님은 아직까지 계시던데, 통장님 임무가 막중합니다, 통 밑에 조직은 ‘반’이다. 그래 반장님도 있었고, 반상회도 했었다. 아직 이런 기억들이 남아있네 신기해. 이래서 글을 써야 돼)
쓰다 보니 스포 했던 동네 형들과 동생들이 아직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등장시켜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살려 보고자 한다. 11살에 급격한? 환경변화는 나에게 많은 추억과 기억을 선물했다. 그래서 아직도 잊히지 않고 내 머릿속 어딘가의 한 구석을 차지하며 남아 있는 거 같고, 그때 이별의 아픔을 알게 되어, 이별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알게 된 시절이었다.
오늘 아침을 맑고, 어디선가 생선을 굽는지 맛있는 냄새가 퍼지는 아침이다. 나도 곧 아침을 먹어야겠다. 내일 또 나는 나의 추억으로 달려가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