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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와의 첫 만남

JJG란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by 시쓰남

25년 9월 23일 아침 06시 18분

뒤척이다 늦었다. 그냥 더 잘까 생각도 했다. 그러면 안 되지, 며칠 되었다고. 점점 게을러지고 있다. 이러다 그냥 나무늘보와 베틀이라도 하려고 하면 큰일인데.


군산으로 이사와 첫 등교까지 어제 이야기했었다. 이제 군산에 와서 만난 친구들을 소개할 차례가 온 거 같다.

난 4학년 3반에 배정되었다. 군산으로 전학 온 학교 이름은 소룡초등학교. 이소룡에 익숙했던 터라 ‘소룡’ 이 단어는 무언가 중국적이면서 무술을 해야 할 거 같은 그런 느낌을 주었지만, 전혀 나의 예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역 명이였다. 다들 기억하실 거다. 전학을 가면 선생님이 소개를 해주고 강단에 올라 자기소개를 한 다음 선생님이 배정해 주시는 자리에 앉아 책가방을 놓고 책을 꺼낸다. 나도 그랬다. 별 다른 건 없었고, 위의 프로세스로 소개 및 인사를 한 다음 2 분단인지 3 분단인지(창쪽 기준으로 1단인지, 교실 정문 기준으로 1 분단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4번째 줄 즈음에 자리를 배정해 주셨던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서울로 전학 온 또는 시골에 서울에서 전학 온 그런. 나도 비슷하게 부산에서 군산으로 오다 보니 친구들의 호기심이 반짝반짝하는 눈빛으로 기억한다. 아니더라도 그렇게 기억하고 싶다. 나의 목소리 톤도 컷 고, 분명 부산 억양을 가지고 자기소개를 했을 터이니, 생소한 억양에 이목을 더욱 집중시키지 않았을까 한다.

내가 전학오기 한주 전 무주에서 친구 한 명도 전학을 와 있었다.(친구 소개 중 가장 빨리 나올 줄은…) 그 친구는 D였는데, 나와는 반대로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 온 친구였다. 바로 내 옆 분단에 앉았고 서로 전학 온 시기가 비슷해 둘이 공통점이 많았다. 그래서 아직 낯선 그곳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으려나?. 그런데 전학 온 지 보름도 안되어서 내가 사고를 쳤다. 바로 이 친구 D와 싸웠는데, 싸운 이유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D가 다른 친구를 놀렸었고, 사과하라고 옥신각신 하다 나의 주먹이 먼저 D의 얼굴을 때리는 싸움이 일어난 것. 점심시간 끝날 때 즘이었나 그랬고, 친구들이 달려와 말렸지만, 결국 선생님에게 들켜 혼이 났다. 왜 싸웠는지 선생님께 소상히 자백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 친구 D랑은 그렇게 추억을 가직하며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쭈욱 동창으로 보냈다. D는 똘똘했고 다부졌다. 이름이 농촌에 살면 많이 들어 봤을 법한 해충의 이름과 비슷해 절대 까먹지도 않는다. (열아~ 잘 살고 있냐? 가끔 니 생각한다.) D는 7통 소속이었고, 통 대항 이어달리기에서 항상 만나는 나의 라이벌이었다. 달리기도 둘이 얼추 비슷해서 체력장? 측정 같은 걸 할 때면 그날 컨디션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D랑은 중 1이 되어 같은 반으로 다시 재회했다. 그때 D는 우등생이었고, 선생님의 케어(매일 문제집 같은 걸 풀어와서 검사를 받는)를 받는 아이였다. 난 그런 케어생(케어받는 학생의 줄임말) 들이 부러웠다.

전학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보다 먼저 전학 온 D가 떠올랐고, 이렇게 D의 소개를 마쳐본다.

전학 왔을 때 따스하게 대해줬던 친구들은 주로 내 주변 4통, 5통 친구들 이였다. 5통 친구는 3명 정도 있었고, 4통 친구는 반에서 회장을 맡고 있는 리더였는데, 이름은 T. 이 이름 T는 흔한 이름이고 한화 이글스 야구 선수 중에도 이 T라는 이름을 가진 선수가 있었다. T는 전체적으로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리고 운동신경이 좋은 친구로 기억한다. T도 대가족이었고 개를 키우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학교 마치면 자주 T 집에 놀러를 갔고, 놀기도 하고 숙제를 하며 나의 추억을 쌓은 곳이다. 내 초등학교 학창 시절 중 기억나는 시절을 꼽으라면 단연 4학년일 것이다. 전학이라는 큰 획을 한번 지나가게 했고,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면 살아가는 나의 적응기가 있었던 시기라 더욱 그럴지 모르겠다. T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내 생활은 안정적으로 정착해서 무난한 학교생활을 하며, 난 이렇게 군산 어린이로 물들어 갔다.

친구들과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많이 했다. 위에 소개한 D, 그리고 회장 T 그리고 T와 같이 어울려 다니는(나도 그곳에 소속이 되었다) 친구들과 축구를 참 많이 했다. 나의 포지션은 이때 정해져서 지금까지도 난 이 포지션을 이력서에 특기란에 적으며 살아가고 있다. 바로 내 포지션은 ‘골키퍼’. 나 어릴 적엔 그랬다. 운동 잘 못하는 친구가 축구하고 싶다고 하면 주는 포지션, 그냥 버리는 자리였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첫째 운동신경도 있었고, 골키퍼가 아니어도 다른 포지션을 얻을 수 있을 만한 볼 컨트롤을 하는 1일 이었지만, 난 골키퍼를 선택했다.(나중 나의 골키퍼 활약상을 한번 정리해서 써야겠다) 내가 왜 골키퍼를 선택했는지 아직도 이유가 떠오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포지션을 맡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 골키퍼 해 본 분들은 아실 거다. 볼이 하프라인만 넘어와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페널티 박스 안까지 들어오면 심장은 폭주 기관차처럼 엄청나게 북을 울려 된다. 그런 긴장감을 안고 날아오는 공 막고, 달려오는 사람 주시해야 되는 아주 힘든 포지션임을 모르고 선택한 게 분명하다. 이 세상 골키퍼 분들 수고가 정말 많으십니다.


군산에 이사 오니 부산과 달랐던 점은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거였다. 부산에서도 종종 자전거를 보았지만, 여기처럼 대중화되어 있지 않았고 활성화되지 않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Y섬 산동네 사는데 그 비탈에 자전거를 누가 탈 것이며, 내려갈 때는 타도 올라올 때는 어느 누구라도 끌고 올라와야 하는데 자전거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군산은 부산과 다르게 평지가 많았고 남녀노소 안 가리고 여기저기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친구 중에도 일부 자전거를 학교에 타고 오는 애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자전거를 타는지 무게중심을 잡는 모습이 너무나 부럽고 멋있었다. 나보다 키 작은 애들도 어른들 자전거를 타는데(안장에는 앉지 못하고 안장 아래 페달 사이로 다리만 넣고 타는 마치 서커스를 보는듯한 자세로 타기도 했다) 나도 자전거를 배워보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T도 자전거를 잘 탔다. T의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꼭 타야지 하는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요즘은 부산에서도 자전거를 타지만, 그전 부산에 살 때는 꿈도 못 꾸어 봤기에, 새로운 장난감? 출현에 많이 설레어 있었다. 참고로 난 자전거에 트라우마가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우리 누나 D가 한창 깡패 짓 할 때였던 거 같은데, 그때 동네 꼬마 세발자전거를 타다 골목에서만 타는 게 지겨워 내리막길인 본 길로 나가서 탔는데, 3발 자전거는 브레이크가 없다. 오직 수제 발 브레이크 밖에 없는데, 내리막길 경사가 많이 가팔라서 절대 자전거를 타면 안 되는 곳이다. 그런데 무슨 마음으로 그리 했는지 본 길에 나가서 자전거를 탔고, 내리막길에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몇 번 뛰어내릴까 말까를 고민하다, 그냥 쭈욱 밑에 동네까지 다녀오자는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불안하게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혹여나 했던 그 불편했던 마음처럼(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평소에 차도 다니질 않는데 밑에서 트럭이 올라오고 있었다. 트럭과 부딪힐 용기는 없어 핸들을 오른 쪽으로 틀었고 잠시후 난 땅으로 떨어져 눈을 뜨고 있어 났는데 같이 놀던 친구들이 뛰어와서 괜찮냐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듣자 하니 자전거를 틀고 길 옆 집 앞에 떨어지기 전에 공중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이 자리에 떨어졌다고 한다. 내가 공중제비를 돌았는지, 하늘을 날았는지는 기억에 없고, 방향을 틀고 난 후로는 모든 기억은 없고 그냥 어두웠다. 그렇게 한참 친구들 사이에 있었고, 나중에 트럭 아저씨도 내려와서 괜찮냐고 물어본 거 보면 기절해서 한동안 누워 있었던 걸로 추측이 된다. 이 사건 이후로 자전거는 쳐다도 안 보았고, 특히 내리막 길에서 자전거는 더더욱 위험하다는 걸 알았기에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런 자전거를 군산에 와서 다시 보니 그리고 평지에서 다시 보니 너무나 타고 싶었고, 타고 싶었다. 자전거 잘 타는 친구가 너무 부러워 어떻게 하면 타는지 많이 물어도 봤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선뜻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달라고 물어보기가 창피했고, 결국 친구가 아닌 사촌형의 도움으로 자전거를 배웠다.


자전거는 정말 잘 배워야 한다. 그중에서 브레이크 잡는 법은 정말 잘 익혀야 한다. 만약에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항상 멈출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게 되지 않으면 많은 위험을 만날 수 있다. 차로 치면 주차라고 해야 할까? 주행은 누구나 한다. 그러나 주차는 누구나 할 수 없다. 어려운 영역이다. 이 어려운 영역이 자전거에서는 브레이크 잡기라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를 배우고, 아버지가 새로 장만도 해 주셨을 때 ‘이동의 자유로움이 이런 것이구나.’를 느꼈다. 자전거는 이동 시간도 절약해 주고 내가 가보고 싶은 곳에 길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게 나에게 자유를 선물해 주었다. 이 자유를 누리기에는 부족한 스킬이 있었느니 바로 브레이크 잡는 법. 나의 브레이크 잡는 스킬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초반에는 멈출 수가 없기에 그냥 들이박았다. 멈추고 싶으면 그 주변 벽에 그냥. 그러다 점차 스킬이 쌓이면서 벽에 박기 보단 저속일 때 바로 자전거에 내리는 기술을 연마했다. 자전거를 타면서 얼마나 넘어졌는지 모른다. 자다 다리를 움직이는데 나도 모르게 아 하는 심음을 여러 번 했었고, 그때마다 엄마에게 혼이 나며 파스를 붙이곤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너무 많이 넘어졌다. 그래서 지금은 자전거 자칭 달인이라 생각한다. 두 손 놓고도 탔었고 자전거를 타다 중간에 내려서 자전거와 같이 러닝도 하는 그러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는 나만의 특이한 스킬을 습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니 혼자 놀 때는 항상 자전거를 탔던 거 같다. 여기저기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난 자전거를 매일 탔다. 자전거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미지의 공간으로 이동시켜 주는 든든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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