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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Jan 16. 2018

이리

잊혀진 도시와 사람들

감독 장률

출연 윤진서, 엄태웅


이 영화 속 두 배우는 자신의 이름으로 연기를 했다. 이 영화 속 오빠 역은 원래 배우 하정우에게 먼저 제의가 갔었다고 한다. 다른 영화 촬영 스케줄과 겹치는 바람에 출연을 할 수 없게 되어 엄태웅이 캐스팅되었다고 한다. 하정우가 예정대로 출연했다면 오빠의 이름은 정우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리역 폭발 사고로 부모를 잃은 남매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남매에게 이리역 폭발 사고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리가 익산으로 바뀐 지금에도 말이다. 이리역 폭발 사고로 부모를 잃은 태웅(엄태웅)은 실질적으로 가정의 가장이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다. 그런 태웅에겐 이리역 폭발 사고 때 엄마 뱃속에서 진동을 받고 태어난 정신지체 동생까지 있다.


영화 이리 스틸컷


태웅에게 진서(윤진서)는 잊고 싶은 기억을 환기시키는 인물이다. 태웅이 택시 기사로 설정된 것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그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택시기사는 목적지를 정할 수 없다. 손님이 가자는 대로 가야 한다. 그는 삶에 이끌려 살아가는 인물이다. 주체가 되어서 이끌어가지 못하고 삶에, 과거의 기억에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이다. 그는 떠나고 싶어하지만, 언제나 그의 삶은 이리 안에서 맴돈다.
 
태웅이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갈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 인물이라면 - 진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진서는 도망가려고 하지 않고, 저항하지도 않는다. 그냥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고통스런 삶을 끌어안는다. 자신을 상처 입히는 남자들까지도. 그녀는 그것 조차도 그냥 받아들인다. 온동네 남자들이 그녀를 욕망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대해도. 그로인해 원치 않은 임신을 하고 여러번 유산을 경험해도. 그녀는 우는 법이 없다. 그녀는 그것조차도 오빠에게 미안해한다. 미안하다고.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이 사회인데.  남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건 세상인데. 그녀는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려고 한다.


영화 이리 스틸컷

그런 태웅에게 진서는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며, 보살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태웅은 그런 그녀가 버겁다. 그녀를 지켜보는 것이 힘들다.
 

그래서 태웅은 진서를 물 속에 처박는다.  모든 것을 다 받아준다고 해서, 바다라고 한다는 그 바닷물 속에 그녀를 처박는 것이다. 진서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태웅은 혼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의 삶은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 죽었다고 생각한 진서가 다시 등장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 한 장면에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들은 누군가에게 평생 남아 그의 삶을 괴롭힌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할지라도 더러는 죄의식을 갖고 살기도 한다. 슬픔과 고통은 오로지 그들의 몫이다.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되지 않으므로, 잊혀지는 그 고통스런 삶은 상처로 남는다. 삶 자체가 상처가 되는 것이다.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진서는 그대로 보여준다. 태웅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하지만, 달아나지 못하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고통은 아무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잊혀지고, 기억되지 않는 그 고통스런 기억은 오로지 개인이 감당해내야 할 과거의 상흔으로 남는다.


어쩌면 너무 잊고 싶어서, 모두들 모른 척 해버린 것일까? 보여도 눈 감아버리고 못 본 척 해버린 것일까? 그래서 이들 남매의 이야기는 - 더 아프게 마음에 와 닿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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