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들로 늘 시끌벅적한 전문대가(前门大街)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三里河’가 유유히 흐른다.
이 강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바로 ‘산리허 공원(三里河公园)’이다. 갈 때마다 도심 한복판에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니, 감탄하게 되는 곳으로 베이징 내 다른 공원에 비해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매력이 넘치는 공간이다.
이 공원에 누구보다 자주 갔었는데 공원 중간에 운치 있게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서점 ‘春风习习’가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문이 열려 있었다면 한 번 제대로 구경하고 끝냈을 터인데, 갈 때마다 특별한 공지 없이 문이 닫혀 있어서, ‘오늘은 열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들렸다가 매번 실패했다. 공원과 서점이라는 콜라보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조합이라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동안 잊고 있다 오랜만에 들러보았는데 서점이 오픈해 있었다. 옆에 무려 카페까지 달고! 서점 ‘춘펑시시’와 한 공간을 쓰는 카페 이름은 ‘Gogogood coffee'였다. 카페 이름 옆에는 사자성어스러운 단어가 붙어 있었는데 바로 '抬头见囍’였다.
직역하자면 ‘고개를 들어 기쁨을 만나라’ 정도의 글귀인데, 이름에 걸맞게 카페 내에는 온통 ‘囍’라는 글자로 뒤덮여 있었다. 그간 ‘幸福(행복)’라는 단어만 너무 편애했었던 모양이다. 컵에도, 벽에도, 커피 머신에도 붙어 있던 새빨간 ‘囍’자는 기대보다 나를 기쁘게 했다. 아무렴, 햇살과 바람이 있고, 어여쁜 강이 흐르고, 강 안에는 건강해 보이는 토실토실한 비단잉어들이 가득하고, 맛있는 커피와 책이 함께인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참 괜찮은 작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살다 보면 잠시 까먹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시간들은 즉각적으로 작은 기쁨으로 가득 찰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하지만 역시 마음을 먹고, 고개를 들고, 그것을 원해야 한다. 그러니까 ‘抬头见囍’, 이 이름의 방점은 '见囍(기쁨을 만나라)'가 아니라 그 앞의 두 글자 ‘抬头(고개를 들어)’에 찍어야 할 것 같다.
산리허에서 시작된 우리의 걷기는 ‘西兴隆街’까지 이어졌다. 西兴隆街에는 내가 좋아하는 카페 ‘福叁’과 ‘大小’가 있고 분위기 있는 바도 꽤 여러 개다. 게다가 이 거리에 붙어 있는 후통들은 매우 깨끗하고 고급스러움이 넘친다. 누가 사는지 매우 궁금해하면서 우리는 ‘고개를 들고’, 이 후통들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들을 만끽하며 걸어보았다.
나에게 작지만 즉각적인 기쁨을 주는 것은 역시 독서가 아닐까 한다. 요즘 음악도 만들고 책도 소개하고, 글도 쓰는 91년생 북유튜버 김겨울의 ‘책의 말들’을 읽는다. 내가 좋아하는 유유 출판사 시리즈 중 하나로 김 작가가 다양한 책에서 그러모은 100개의 문장과 그에 대한 짧은 단상들로 이루어진 책이다. 이 책은 손으로 잡히는 종이로 읽고 밑줄도 긋고 싶어서 알라딘에서 주문했다. 공산당 100주년 시즌이라 오는 길은 다른 때보다 더 험난했다. 책값은 13,000원인데, 배달료는 더 비싸고, 박스 안에 든 물건들과 책 이름까지 세관에 보고해야 했다. 어쨌거나 무지 귀하게 도착한 책이라 아껴서 보고 있다. 책과 글에 대한 사랑이 주렁주렁 매달린 책인데 공감 가는 부분이 정말 많아서 벌써 책이 좀 너덜너덜해졌다.
멍청한 짓을 저지른 후 그걸 수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 글쓰기가 멍청한 짓을 무마해 주어서가 아니라 내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걸 받아들이게 해 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노트는 자신의 한심함과 부족함, 답답함, 슬픔, 종내는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는 체념으로 가득 찬다. 노트 속에서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둡다. 그러나 빽빽이 채워진 노트는 세상에 대한 그 빽빽한 미련으로 오히려 세상과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는 증거, 더 나아가 사랑하고 싶지 않았으나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열렬한 러브 스토리의 증거로 남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을 미워하면서 사랑하고, 세상을 미워하면서 사랑한다.
그리하여 누구나 죽을 때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자신만이 읽을 수 있는 외로운 책을 갖게 된다. 자신만이 읽었고 읽을 수 있으며 단 한 번 낭독되었고 앞으로 결코 완독될 일이 없는 책이다. 누구도 읽을 일 없는 이 책을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쓰는 태도를 우리는 품위라고 부른다.
삶이 인간을 받쳐 주기를 멈추어 그가 바닥없는 심연으로 떨어져 갈 때 문학은 그가 아예 지구 속을 통과해 새로운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것은 외면이나 냉소가 아닌 간절한 제의에 가깝다. 문학은 그가 너무 빠른 속도로 떨어지지 않도록 날개를 달아 준다. 그리고 삶의 중력이 한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하여 떨어지는 이는 떨어지는 순간 그것이 떨어짐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의 추진임을 깨달을 수 있다.
모두, 책의 말들에서
마흔쯤 되면 어느 한 쪽으로 적당한 결론이 날 줄 알았는데, 아직 너무 어린 것인지, 여전히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또 과소평가한다.
희뿌연 희망과 명료한 좌절.
인생은 어쩌면 그 사이를 끝없이 달려야만 하는, 종점 없는 서울 2호선 전철 같은 것인가? 그렇다면 골 때리는 낙천주의자인 내게도 산다는 것이 꽤 괴로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숙명 속에서 그나마 ‘외면이나 냉소가 아닌 간절한 제의에 가까운’ 글들이 추락하는 나를 붙잡아 줄 수 있다는 믿음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그러니까 아마 나는 ‘결코 완독될 일 없’고 ‘누구도 읽을 일 없는’ 나만의 책을 열심히, 가끔은 아름답게 써 내려가며, 내게 먼저 다가올 일 없는 기쁨들을 찾아 자주 고개를 들며 뭐 그렇게 품위 있고, 산만하게 늙어갈 것이다.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들
1. GOGOGOOD 카페 야외에 앉아 잡지 책 보기
2. 산리허 공원을 유유히 돌아다니는 닭들과 내 허벅지 만한 비단 잉어 만나기
3. 거리에서 마작 두는 중국 할아버지들 구경하기
베이징_도시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