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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의 흔적, 炒豆&帽儿胡同

부끄럽지 않은 삶

by 심루이

가끔 집 앞 놀이터에서 중국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대부분 손주를 보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다. 북방 특유의 ‘얼화’가 심하고 자신만의 발음 습관에 이미 길들여져 있는 노인들의 발음은 어딘가 특이한 구석이 있어… 처음엔 잘 안 들렸다. 조금씩 중국어가 들리기 시작하자 굉장히 신났다. 그래! 이제 중국인과 수다를 떨 수도 있겠어. 하지만 이내 더 난감한 상황이 생겼다. 노인들의 관심이 정치나 역사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자꾸 그 쪽 분야 이야기만 하신다는 것이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의 만남이나, 예전 일본 학살로 고통 받은 중국과 한국의 이야기... 그러다가 급기야 중국과 한국, 일본은 원래 다 한 나라였다는 결론으로 치닫으면… 공짜로 중국어 회화 수업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은 저 멀리로 보내고 ‘저 급한 일 생겨서 먼저 가볼게요, 짜이찌앤!’을 외쳐야 했다.


타국에서 아이를 키우며 산다는 건 내게 우리 나라의 역사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숙제로 끝없이 요구한다. 역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국사 과목이란 암기에 능한 내게 ‘시험 평균 점수’를 올려주는 효자 과목이자, 시험 끝나면 모조리 까먹는 게 당연했던 철없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자연스럽게 상해에 가서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찾고, 하얼빈 여행 관광 리스트에 ‘하얼빈 역’을 넣는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내가 누리고 있는 지금의 이 자유와 '한국인'이라는 타이틀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어쨌든 다시 역사를 읽다 보면 이상한 일들 투성이다. 윤봉길 의사는 내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월급으로도 메꿀 수 없는 사고를 치면서 빌빌대고 있을 25살의 나이에 도시락 폭탄을 던졌고, (그는 당시 두 명의 자식도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사촌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송몽규 선생은 열아홉의 나이에 조국을 구하겠다고 중국으로 넘어가 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안중근 의사는 31살의 나이에 적국의 수장에게 총을 쐈다.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재차 던지고 무수히 고개를 젓는다.




내가 자주, 무심히 걷던 난뤄구샹의 수많은 후통에 단재 신채호 선생과 우당 이회영 선생의 흔적이 있다. 두 분은 조국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다 뤼순 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생을 마감한 비슷한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차오떠우후통(炒豆胡同)은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훌륭한 글 솜씨를 자랑했다는 '천재적 글쟁이'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1921년 1월부터 1922년 여름까지 머물렀던 골목으로 난뤄구샹 들어가자마자 바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서민들이 주거하고 있는 특별한 포인트가 없는 후통이라, 모르고 스쳐 지나가면 그저 스쳐 지나갈 골목이다.


이곳에서 신채호 선생님은 박자혜와 신혼집을 차려 큰 아들 ‘신수범’을 낳았고 중국어 독립운동 잡지인 ‘천고’를 발행했다. 천고는 7호까지 발간됐다고 알려졌는데, 현재 베이징대 도서관에 1-3호가 소장돼 있다고 한다. 신채호 선생님이 살았던 곳의 정확한 주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자전거를 타고 차오떠우후통 후통을 달리며 당시 신채호 선생님이 이곳에서 느꼈을 마음들을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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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오전의 차오떠우 후통, 아쉽게도 단재 선생이 머물렀던 공간의 정확한 주소는 남아있지 않다.




스차하이와 연결돼 있는 마오얼 후통(帽儿胡同)에는 조선 최고 명문가 출신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 베이징에서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 있다.


혁신적이고 실천적인 양명학 계통의 유학자 출신의 우당 이회영 선생은 신채호 선생 등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다고 한다. 우당을 포함한 여섯 형제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전 재산을 팔아 1911년 만주에 '신흥 무관 학교'를 설립하고 수많은 독립 투사들을 배출하는 등 평생을 바쳐 다양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우당은 1919년 3월 베이징에 처음 왔고, 1925년 12월 톈진으로 이사하는 등 6년 9개월동안 6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조선의 최고 명문가 자손이었지만 독립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자금의 압박 때문에 가난을 견뎌야만 했다. 마오얼 후통의 29호 공간 또한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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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가문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것)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위대한 활동을 보여 준 우당 일가


그 외에도 마오얼 35호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아내이자 아편 중독으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마지막 황후 완릉이 결혼 전까지 생활했던 곳이다. 베이징시 문물보호 단위로 지정, 그러나 개방은 하지 않는다.


11호는 태평 천국의 난 당시 청말기 대학사 원위(文煜)가 살던 곳으로 중화 인민 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북한 대사관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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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얼후통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 역을 맡았던 배우 박정민은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을 수상하고 이런 말을 했다.

“70년 전에 나라를 잃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70년 후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라가 많이 어수선한데 송몽규 선생님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야겠다”


정말 그렇게 살아야 겠다.


베이징_도시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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