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지속되던 두뇌 백지화 현상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외국어 메뉴판을 받아 드는 것은 손잡이 없는 건물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다. 얼마 못 가 숨을 헐떡일 수밖에 없다.
천샤오칭, <궁극의 맛은 사람 사이에 있다>, 418 p
식당에서 주문을 한다. 많은 가게들이 자리에 주문용 QR 코드를 붙여 둬서 한마디 말조차 필요 없을 때가 많지만(이곳은 길 위의 부랑자도 QR코드를 들이밀며 구걸을 하는 무서운 도시다) 종업원에게 직접 주문을 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간의 욕구 중 가장 위대한 식욕 해결을 위해 식당에서 자주 쓰는 문장과 단어들을 배웠다. 손을 들고 ‘니하오(您好)’ 혹은 ‘푸우위앤(服务员)’이라고 공손하게 부른 뒤 ‘실례지만’이라는 의미의 “请问”, “麻烦您”으로 부드럽게 시작해서 “메뉴판 좀 부탁드릴게요” 정도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면 된다. 하지만 중국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내 머리는 모든 것을 백지화시킨다. 당황하니 외웠던 문장들이 기억이 나지 않고 ‘차이딴(菜单_메뉴판)’같은 간단한 단어들만 머릿속을 떠돈다. ‘어이’ 정도의 발음으로 종업원을 불러서 차이딴이라고 외쳤다. 메뉴판 사진을 손가락으로 찍찍 가리키며 ‘쩌거(这个_이거)’, ‘쩌거’라고 주문을 마치고 생각해 보니 방금 내가 삼류 건달에 빙의해 ‘어이, 메뉴판, 내놔, 이거, 이거’ 정도로 말한 것을 깨달아 버렸다. 나 동방 예의지국 출신인데, 어물전 망신의 대표 주자 꼴뚜기가 된 기분이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백 번 천 번 다짐을 해보지만 한동안 ‘식사 주문 시 두뇌 백지화 현상’은 지속되었다. 그러니 그 이후로도 나는 꽤 오랜 시간 단어 위주의 짧은 언어를 구사하는 건방지고 예의 없는 외국인이었다.
메뉴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메뉴판에 사진이 있다면 그날은 무척 행운이 따르는 날이다. 사진만 보고 대강 주문하면 되니까. 빽빽한 글자로만 이루어진 메뉴판도 부지기수였는데 그런 날엔 아주 긴 해독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고개를 파묻고 고시생처럼 집중해서 법전, 아니 메뉴판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열심히 파파고를 돌렸다. 그냥 대강 시키지 유난이냐 싶겠지만 이곳은 의자 다리 빼고는 다 먹는다는 중국이 아닌가! 별생각 없이 시킨 요리가 비둘기 일지, 개구리 일지 모르는 상황이라 절박했다. 그런데 메뉴와 재료 종류는 왜 그렇게 징글징글하게 많은지. 두부면 두부고, 버섯이면 버섯이지… 언두부에 건두부에 푸쥬(길에 말아 압착한 두부)에 튀긴 두부에… 팽이, 느타리, 목이, 표고버섯을 중국어로 뭐라고 하는지도 당최 모르겠고… 아아악. 열심히 해독해봐도 빠르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베이징 생활 초반에는 꽁바오지딩이나 마파두부, 양배추나 청경채 볶음처럼 신원이 확실한 음식을 많이 먹었다.
메뉴판도 없고 직접 카운터로 가서 종업원에게 주문하는 시스템이 난이도가 제일 높았는데, 손이 절대 닿지 않는 종업원 머리 위 전광판에 메뉴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손가락을 꼿꼿이 세우고 잘 조준해서 원하는 메뉴를 가리켜도 종업원은 다시 되물어볼 때가 많았다. 약간의 요령이 생긴 뒤로는 원하는 메뉴를 카메라로 찍은 뒤 클로즈업해서 종업원에게 보여줬다. 그래, 역시 사람은 도구를 써야 해. 흐뭇해하고 있는 나를 굴복시킨 지인의 방법이 있었으니 회사에서 발표할 때 사용하는 ‘프리젠터 포인터’의 불빛을 이용해 원하는 메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고 고운 포인터를 꺼내 진지하게 주문을 하는 그와 불빛의 끝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을 종업원의 눈빛을 떠올렸다. 도구적 인간의 끝판왕을 본 것 같아 한동안 혼자서도 낄낄댔다.
다행스럽게도 건방지기만 한 건 아니었다. 가끔은 지나치게 공손했다. 문장의 시작마다 ‘请问麻烦您’이라는 표현을 구사했다. 번역하자면 ‘실례지만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정도가 되려나? 학교 교재에서는 종종 등장하는 표현이지만 실생활에서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었다. 중국 드라마를 보다 보니 호텔 프런트 직원이 예약자 이름을 물어볼 때 딱 한 번 나왔다. “请问您贵姓?(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중국어를 책으로 배웠던 나는 식당에서 주문을 하면서도, 거리에서 화장실을 찾으면서도 ‘동방예의지국’ 출신임을 뽐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은 어디입니까?”, “죄송하지만 제가 주문을 하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정말 귀찮으시겠지만 몇 장의 냅킨을 가져다주실 수 있으십니까?” 정도의 공손함이였으려나.
칭원닌랑워(请问您让我)라고 그윽하게 문장을 시작한 채 다음 질문을 생각하다 보면 앞사람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다. ‘얘 지금 나한테 뭘 부탁하려고 이렇게 진지하지?’라는 표정이다. 난 그저 화장실을 가고 싶을 뿐이었는데.
2년 과정을 마치고 학교에서 학원으로 옮겼는데 학원 선생님의 강의가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이런 마음은 담아두지만 말고 꼭 표현해야 된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근래에 배웠던 비교문을 구사하기로 했다. 수업 전에 여러 번 연습을 하고,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네 강의가 학교 강의보다 더 좋아”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의 칭찬을 들은 선생님의 표정이 순식간에 까칠해졌다. 비교문의 A와 B를 바꿔 넣은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천진난만하게 “네 강의보다 학교 강의가 훨씬 더 좋아”라고 굳이 이야기하는 아주 뻔뻔하고 이상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
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