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희망이라는 길이 된 루쉰과 루쉰슈뎬

영혼의 마취 없이는 살 수 없는 사회

by 심루이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열일곱의 나는 루쉰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면서 이 글귀가 너무 좋아서, 노트 맨 앞 장에 쓰고 지니고 다녔다. 삶이 아주 절망적으로 느껴질 때마다 땅 위의 길을 생각했다. 절망보다 더 무서운 건 ‘무망’이며, 삶 속에 희망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마흔 살의 여름, 베이징 루쉰 박물관에서 이 글귀를 다시 만났다.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 루쉰(鲁迅/본명 저우수런)은 중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이자 사상가로 <광인일기>, <아큐정전> 등을 썼다. 샤오싱(绍兴/소흥)에서 태어났으며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 위해 1902년 일본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비참한 현실을 확인하고 사람들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와 문학에 매진한다. 하지만 '신생'이라는 잡지 출간에 실패한 뒤 그는 골방에 갇혀 비문을 베끼면서 폐인처럼 지낸다. 소설을 처음 쓰게 된 계기가 인상적이다. 친구 쳰쉬안퉁이 찾아와 쓸데없는 비문 말고 소설을 써보라고 한다. 루쉰은 “절대 부술 수 없는 방에 수많은 사람들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몇몇을 깨운다면 그들에겐 불행한 임종의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닌가?”하고 반문한다. “그래도 기왕 몇몇이라도 깨어났다면 철망을 부술 희망이 절대 없다고 할 수 없다”라는 친구의 대답에 그는 소리를 질러 단 한 명이라도 깨울 결심을 한다. 그렇게 중국 최초의 현대 소설 광인일기가 탄생했다. 소설을 처음 쓰게 됐던 계기를 생각해 보면 그의 소설집 이름이 <외침>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외침의 서문에서 '병으로 죽어가는 인간이 많다 해도 그런 것쯤은 불행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들의 정신을 뜯어고치는 일이었다’라고 썼다. 이후 주어진 삶에 순응하지 않으며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고 모든 권력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것은 그의 글쓰기, 아니 삶의 본질이 되었다. 루쉰은 소설 창작보다는 현실참여에 주력해 스스로 ‘잡문’이라 명명한 산문 글쓰기에 매진한다. 글 속에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억압하는 현실과 맞서 싸우는 그를 만날 수 있다.


그의 표현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영혼의 마취 없이는 살 수 없는 중국 사회'였다. 베이징에 살아보니 공산당이 주축이 되는 경제, 정치 관련 논리는 정당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호구나 입시, 부동산 제도도 마찬가지였다. 제일 불편했던 것은 페이스북과 구글, 인스타그램이 차단되고 읽고 싶은 뉴스를 제대로 읽기가 힘들다는 것.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중국 민주화 운동가 류샤오보의 사망 소식 또한 중국 서비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섯 차례의 체포, 투옥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대한 소신을 꺾지 않아 ‘중국의 만델라’로 불렸던 류사오보는 대부분의 중국 사람들에게는 없는 사람이었다. 중국 최대 모바일 메신저에서는 류샤오보와 그의 부인 류샤의 이름이 포함된 문장은 전송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이상한 일에도 마취된 듯 분노를 잃어버린 중국인들을 마주할 때면 '소리 없는 중국'을 비판하던 루쉰을 떠올렸다. 중국인에게는 촛불 시위로 대통령을 탄핵시킨 한국인이 별종이었을 것이다.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내게 쏟아내는 질문은 거의 탄핵 사건에 관해서였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베이징에서 루쉰은 거주지를 자주 옮겨 다녔다. 그의 사상과 문장들을 떠올리며 근처를 걸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산책이 될 것이다.


베이징에서 루쉰의 첫 거주지는 샤오싱 출신의 사람들을 위한 숙소였던 '샤오싱 회관(绍兴会馆)'이다. 이곳에서 그는 4년을 지냈다. 이후 1916년에 일본에서 귀국한 동생 저우쩌런과 함께 살기 위해 샤오싱 회관 바로 근처의 부수수우(补树书屋)로 옮긴다. 이곳에서 <광인일기>와 <쿵이지>를 집필했다.


이후 1918년 동생이 일본인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더 큰 공간이 필요하게 되면서 빠다오완(八道湾)후통 11호로 이사한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루쉰은 이때 고향에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막내동생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돌아온다. 이 집은 오랫동안 외로움과 싸워오던 루쉰에게 큰 기쁨을 준 곳으로 무엇보다 어머니와 함께라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다. 루쉰의 대표작 <아큐정전>이 바로 이 때 나왔다. 베이징 대학 등에서 강의도 했고, 좋은 작품들도 대거 발표한 시기였다.


좋은 시절도 잠시, 저우쩌런의 일본인 아내로 인해 형제 사이가 틀어지고 동생에게 절연 편지를 받은 루쉰은 1923년 좐타후통 61호에 새 집을 얻었다. 이 곳은 이전 집에 비해 너무 작았고 당시 루쉰의 수입도 불안정했다. 이때 얻은 폐병은 결국 루쉰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10개월 후 루쉰은 시싼탸오(西三条)후통 21호로 이사한다. 이 집은 전형적인 사합원이지만 특이하게 가운데 방 뒤에 작은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 루쉰은 이 공간에 '호랑이 꼬리'라는 별명을 붙이고 이곳에서 두 번째 소설집 <방황>을 비롯해 <야초>,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화개집> 등 수많은 글을 썼다. 그리고 연인 쉬광핑을 만났다. 루쉰은 1926년 쉬광핑과 함께 14년간 머물렀던 베이징을 떠나, 이후 1939년 10월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쪽 지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후 시싼타오는 궁먼커우얼탸오후통으로 바뀌었고, 쉬광핑은 베이징에서 루쉰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이 집과 루쉰의 유품 모두를 국가에 헌납했다. 이곳은 루쉰 탄생 100주년이었던 1981년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루쉰 박물관 옆에는 루쉰 서점과 카페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문학청년들은 이곳에서 루쉰의 소설을 사고, 자신의 노트에 루쉰 캐릭터 도장을 찍는데 열을 올린다. 지방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천안문이 그러하듯, 중국 문학청년들에게 이곳의 방문은 일종의 버킷 리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쉰 서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역시 그의 대표작 <아큐정전>이다. 내가 처음 본 루쉰의 작품이기도 하다. 읽기 전에는 아큐의 ‘정신승리’에 대해서 중국인들의 강인한 정신력을 자화자찬하는 내용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했다. 웬걸. 책을 제대로 읽어보니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정반대였다. 루쉰은 아큐라는 인물을 통해 어려운 상황에서 도피하고 자리 합리화에 성공하는 중국인들을 꾸짖는다.


-하지만 그는 즉시 실패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뺨을 두 차례 때렸다. 얼얼한 통증이 왔다. 때리자마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때린 것은 자신이고, 맞은 것은 또 다른 자기인 듯 느껴졌다.


오랜 시간 아큐의 정신승리를 오해하고 있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중국 사회와 중국인들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그의 글을 더 찾아 읽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손해를 보고 모욕을 당하고도 언제나 해야 할 말을 못 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사정을 예로 들어봅시다. 중일전쟁, 권비사건, 민원혁명과 같은 큰 사건이 있은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렇다 할 저작을 한 권이라도 내놓은 것이 있습니까? 민국 이후에도 여전히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국에서는 중국에 대한 말을 자주 하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중국 사람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외국인의 목소리입니다. 247p


-소리 없는 중국에 대한 비판 청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중국을 소리 있는 중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대담하게 말하고 용감하게 나아가면서 모든 이해관계를 잊어버리고 옛사람들을 밀어 치우고 자기 진심을 말을 해야 합니다. 252p


-나는 때때로 중국이 평등을 대단히 사랑하는 국가였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조금 특출 난 것이 있다면, 누군가가 칼로 잘라 평평하게 만들어 버린다. 인물을 들어 얘기한다면 쑨구이윈은 육상 단거리의 명수였는데 상하이에 오자 웬일인지 맥이 빠지고 힘이 없어 이윽고 일본에 도착했지만 달릴 수가 없었다. 554p


<루쉰잡문집> 중


중국 문학을 읽으니 직간접적으로 루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가는 거의 없었다. 어릴 때 루쉰의 글을 보고 문인의 꿈을 키운 이들, 중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루쉰 문학상 수상자도 한 트럭이었다.


갈수록 자유가 사라지고 있는 지금의 중국에 그가 살아있다면 어땠을까. 1957년 상하이에 들린 마오쩌둥에게 누군가 루쉰이 지금 살아 있다면 어땠을지 묻는다. 마오쩌둥은 망설임 없이 '감옥에 갇혀 글을 쓰고 있거나 아니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서 아무 소리 않고 가만히 있을 것 같소.'라고 대답한다. 부당한 상식과 권력에 투쟁하는 그의 신념은 세월이 갉아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루쉰이 침대에 누워 상상해 봤다는 유언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활을 해나가라. 그러지 않는다면 정말 바보 멍청이다.


그는 세상을 비판하는 자신의 글이 더 이상 읽히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허나 아직도 세상에는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바보 멍청이가 많다. 그가 바라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희망이라는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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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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