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 J의 환장 여행

15년이 지나도 너무 다른 사람

by 심루이

1.

첫 사건은 핀란드 헬싱키에서 일어났다. 심이가 도시 풍경을 그리겠다고 챙겨 온 갤럭시패드의 펜슬이 첫 도시인 핀란드 카페에서 고장 난 것이다. 내가 눈치를 본 사람은 계획에 차질이 생긴 심이가 아니라 '문제 해결'에 진심인 춘이었다. 사실 심이는 '그려도 그만, 안 그려도 그만' 정도의 마음가짐이었는데 춘은 심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눈 오는 헬싱키의 풍경을 만끽하는 동안 춘은 근처 삼성 매장을 폭풍 검색하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삼성 매장은 헬싱키 시내에서 너무 멀어서, 잠시 경유하는 우리는 갈 수 없었다. 춘은 굴하지 않고 아마존 특급 배송 서비스를 시도했지만 계속되는 회원 인증 오류로 인해 방법이 없는 듯 보였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펜을 잃어버린 사실조차 희미해진 바르셀로나 일정 마지막 날, 춘이 의기양양하게 가져온 박스에 들어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갤럭시패드의 펜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던 바르셀로나 호스텔 사장님께 상황 설명을 한 뒤 그의 아마존 아이디를 빌려서 주문에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의 마무리는 심이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 펜슬을 딱 한 번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내가 눈치 줘서 한 번.

훗날 그의 사진 폴더에서 발견된 아마존 주문 '시도'의 흔적들


2.

이번 여행 숙소 중 가장 기대한 네르하 파라도르에 도착했다. 핸드폰 사진을 노트북에 옮기려고 짐을 살폈는데 그 역할을 해 주던 USB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진을 이미 노트북으로 옮겨 놓았기에 큰 손실은 아니었지만, 분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실내 공기가 무거워졌다. 냉정하게 판단해 보건대 이전 도시였던 그라나다 호텔 방에 두고 왔을 확률이 높았다. 춘은 호텔 프런트로 바로 전화를 걸었고,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추가로 발견되면 즉시 알려 달라고 연락처를 남겼다. 다음 날 극적으로 발견된 우리의 USB. 호텔 쪽에서는 따로 쓰는 택배 회사가 없다며 직접 섭외해서 알려달라고 했고... 춘은 또다시 폭풍 검색 끝에 스페인 택배 회사 한 곳을 섭외하기에 이른다.


이동 시간을 면밀하게 고려해 다음다음 도시인 세비야 호텔로 받기로 결정하고 결제를 진행하는데 홈페이지에서 결제가 되지 않았다. 네르하 파라도르 선베드에서 햇살을 만끽하다 발견한 것은 수차례 결제를 시도하다 결국 택배회사 직원에게 카드 번호를 불러주고 대리 결제를 부탁하고 있는 춘이었다.


세비야 호텔 프런트에서 그 택배를 받았을 때 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본 그의 표정 중 손에 꼽게 순수한 기쁨이 어려있었다.

문제의 USB


3.

수화물로 붙였던 보스턴백 한쪽 손잡이가 뜯어진 것을 발견한 것은 밤 열 시의 포르투 공항이었다. 버리면 그만인 가방이라고 생각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출구로 발을 옮기려는 순간, 비장한 춘이 우리를 막아 세웠다. 공항 수화물 사무실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2주간 이어진 여행, 이미 리스본을 경유하고 온 데다 지금은 밤 열 시가 아닌가. 너무나 피곤했기에 '호텔로 그냥 가자'고 설득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것(=문제 해결과 적절한 보상)은 그에게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기쁨과 희열, 삶의 가치와 이유와도 연결되어 있는 중대한 문제임을 나는 이번 여행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와 심이는 '대장'을 졸졸 따라 공항 사무실 앞으로 갔다. 유럽 사람들의 일처리 속도는 중국인 뺨치게 느려서, 우리는 꽤 오랜 시간 그 앞에서 대기를 해야 했다. 열한 시가 넘어서 가까스로 포르투 호텔에 도착한 우리. 심이와 나는 나란히 서서 고생한 춘을 위해 박수를 쳤다.


삼 일 후 우리는 리스본 호텔에서 새 캐리어 하나를 선물 받게 된다.

오른쪽이 뜯어진 가방이고 왼쪽이 보상으로 받은 새 캐리어다.

4.

여행지에 가면 ENFP인 나는 주로 열렬하게 감탄하고, ESTJ인 춘은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한다.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문제가 아니라면 우선 덮는다. 여행지에서 보내는 소중한 시간을 문제 해결에 '허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기준일 뿐, 낯선 장소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큰 기쁨인 사람도 있다. 퀘스트를 풀어가며 희열에 찬 춘의 얼굴을 바라보니, 힐링이란 모름지기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멍 때리는 것이라는 나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저 우리는 각자가 믿고 있는 가치를 쫒으며 살아간다. 그간 같은 회사에 다니고, 한 아이를 낳고, 육아 동지가 되고... 각종 난관들을 15년 넘게 함께 헤쳐오면서 이제 나만큼 그 사람을 알게 됐다고 착각한 것을 반성한다. 문제 해결에 집착(?)하고, 능하며, 희열을 느끼는 그의 본질적인 욕구에 대해 이번 여행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바라보게 됐다.


누군가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다면 역시 함께 장기 여행을 떠나면 된다. 계속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고, 돈을 쓰는데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기 어려우며, 오래 걸어야 해서 피곤한데다, 음식도 입에 맞지 않을 확률이 높은 환경의 장기 여행은 한 사람의 장단점을 극대화한다. 무엇보다 개인의 취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행지에서는 행복할 이유도 많은만큼 갈등을 일으킬 요건도 많고 많다. 이쯤되니 장기 여행이 주는 최고의 이점은 개고생 퍼레이드와 각종 사건 사고를 함께 겪어내며 나와 동행자에 대해 보다 심층적이고도 면밀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도, 이해할 필요도 없다. 제일 좋은 동행자가 되는 방법은 각자의 감정과 방식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그저 내버려 두는 것이다. 백 번 다시 태어나도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더라도 절대 티 내지 말 것.


여행에서도, 그리고 인생에서도.

그가 여행 끝나고 내게 전해 준 영수증과 사진은 2만 장이었다. 아아악 제발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keyword
이전 18화아침 산책과 도시 애정도의 상관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