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정너와 개취존 사이

엄마의 여행법

by 심루이

1.

질문의 대답을 정해놓고 물어볼 때가 많았다. 전문 용어로 '답정너'라고 한다. 여행과 관련해서는 이런 경향이 짙어진다. 여행 장소를 정할 때부터 나의 질문은 사실 이랬다.


-심아, 어디로 여행 가고 싶어? 스페인 아니면 호주? 근데 호주는 조금 심심할 거 같아. 스페인이 얼마나 좋냐면... (블라블라)


여행 중간에도 나의 질문은 이런 식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이가 보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궁금증과 스트레스가 '조금' 있었기 때문이다. 비싼 비용을 지불한 여행에서 우리가 흔히 받는 본전이나 교훈에 대한 압박들. 하지만 가우디 구엘궁전 앞에서 케이팝 댄스를 추는 아이를 보며 명확하게 알게 됐다. 나의 궁금증과 교훈에 대한 생각이 3주간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할 것이라는걸.


첫 도시인 바르셀로나를 떠나며 나는 결심했다. 무사히 이 여행을 마무리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쿨하고 너그러운 엄마가 되자. 3주 만이라도!!!


행동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섣부르게 아이에게 "여기 어땠어?"라고 묻지 않기, 독립 생물체인 아이의 느낌과 감정을 그냥 거기 남겨 두기.

-내가 멋지다고 느끼는 것,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여행'을 아이에게 주입하거나 강요하지 않기.

-성당이나 유적지는 하루에 한 개 이상 가지 않기.

-역사나 위인 이야기를 줄이고 아이 이야기를 듣기.

-여행의 본전이 생각난다면 스스로 더 즐겁고 행복해질 것을 찾기.


엄마에게 필요한 여행법은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이방인'일뿐이니까.

스페인여행 (7).jpg
스페인여행 (91).jpg


2.

우리 여행의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는 '개취존' 정신이었다. 초딩 3년차 입에서 시작된 개취존이 우리의 여행을 무사히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뜻 들으면 욕의 일종처럼 느껴지는 발음을 가진 이 단어는 개인취향존중의 준말이다. 특히 모두의 취향이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는 여행의 여정에서 이 단어가 가진 힘은 무시무시하다.


위대한 메스키타보다는 소매치기에 더 관심이 많은 아이 앞에서, 경이로운 알함브라 궁전에서 벽돌 틈샷에 열중하는 아이 앞에서 나는 이 정신을 생각했다. 개취존. 이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끝났다.


21일간 붙어 다니며 아이와 참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대부분 여행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아이가 생각하는 최근 초딩 트렌드, 재미있게 본 유튜브 영상이나 친구들의 카톡 프로필에 대한 것이었다. 아이는 대단한 역사 유적지 앞에서 유독 수다스러워졌다. 하필? 지금? 여기서? 그걸? 짜증이 샘솟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위대한 개취존 정신을 생각했다. 아이는 대항해 시대의 역사보다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답니다, 어머니. 마음을 비우고 듣다 보니 아이가 재미있어하는 것, 해보고 싶어 하는 게 이렇게 많구나 새삼스러웠다.


개인의 취향과 성향, 개인의 행복까지 열린 마음으로 지지하고 존중할 때 우리의 여행은 갈등 없이 행복할 수 있다. 사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개취존을 잊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많은 갈등들이 줄어들 것이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개취존 만세.

스페인여행 (76).jpg
스페인여행 (172).jpg


3.

포르투의 한 레스토랑에서 빵에 버터를 발라 먹던 심이가 진지하게 버터에서 바나나 향이 난다고 했다. 버터를 일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한식파 심이이기에 '아닐걸? 니가 오랜만에 먹으니 그런가 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심이는 조금 억울한지 진짜 바나나 향이 난다고 다시 말했다.


결국 춘이 직원을 불러 무슨 버터인지 묻는다고 하길래 나는 말리고 싶었다. '핫플레이스에서 제일 바쁜 시간에 무슨 쓸데없는 질문이야?' 정도의 문화 시민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반전은 그것이, 정말, 글쎄, 바나나 버터였다는 것이다.


쾌활한 직원의 입에서 '버내너'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나는 심이의 환호성과 더불어 나의 한 세계가 와장창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럴 수가.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앞에 있던 맥주를 원샷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홍당무처럼 빨개진 나의 얼굴이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라 맥주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절대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다. 오히려 하얘진다.)


나는 내가 장금이를 낳았다는 것을 포르투에서야 알게 되었다며 심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엄마가 네 의견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아닐 거라고 치부해서 미안해, 정말.


이 사건은 내게 큰 깨달음을 줬다. 아이의 생각과 의견을 내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 더불어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스페인여행 (157).jpg
스페인여행 (147).jpg


4.

여행 초반 스페인의 부족한 공중화장실과 넘치는 소매치기에 불만이 많던 심이는 여행 중반으로 넘어가며 자신만의 여행법을 스스로 찾아갔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댄스 영상을 찍고 자신만의 느낌이 담긴 사진을 생산했다. 그녀는 역사적인 건축물보다는 다른 각도로 바라보는 도시 풍경이나 누군가 아무렇게나 그려둔 낙서에 관심이 많았다. 자물쇠 같은 소품을 이용해 촬영하기도 했다. 아이는 우리도 깜짝 놀랄 만큼 뻔하지 않은 좋은 사진을 찍었다.


또 아이는 가끔 질주하는 나를 불러 세워 챙길 것 많은 분주한 아빠를 함께 기다리자고 했다. 우리 사이에 균형이 흔들거릴 때 그것을 잡아준 것도 결국 아이였다.


덕분에 아주 다른 언어들 사이에 우리의 언어를 덧붙이고 다른 이들이 펼쳐 놓은 상상에 우리의 상상을 더하면서 우리는 꽤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스페인여행 (149).jpg
스페인여행 (32).jpg
리스본여행 (19).JPG


5.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밤, 카몽이스 광장 바닥에 앉아 감성적인 버스킹을 듣고 있는데 '얼른 한국 가서 친구들과 놀고 싶다'라고 내내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갑자기 "엄마, 아빠와 다시 유럽에 오고 싶어"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아이를 보니 아쉬움, 고마움, 안도감, 미안함이 범벅된 감정이 쏟아져 나도 같이 엉엉 울어버렸다. 껴안고 엉엉 우는 감성폭발 모녀 옆에서 진심으로 당황한 ESTJ 아버님...


-너네 울...울어?

(T는 정당한 이유와 필요가 있을 때 눈물이 난다고 한다. 나는 춘이 우는 걸 사실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다음에는 엄마가 더 잘 할게. 엉엉 처음부터 개취존 정신을 탑재할게. 엉엉


아름다운 마지막 밤이 가고 있었다.


#아래는 심이 사진들

스페인여행 (198).jpg
스페인여행 (202).jpg


KakaoTalk_20230301_134430598_04.jpg
KakaoTalk_20230301_134430598_07.jpg
KakaoTalk_20230301_134430598_17.jpg
KakaoTalk_20230301_134430598_20.jpg
KakaoTalk_20230301_134430598_25.jpg
스페인여행 (180).jpg
스페인여행 (196).jpg
스페인여행 (199).jpg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keyword
이전 19화P와 J의 환장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