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살아도 미처 알지도 못한 채 끝나버릴 위험에 처한 '그것들'
1.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기의 본질이란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려고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3주 여행의 끝에서 나는 이 문장을 떠올리며 각자가 얻은 '다른 어떤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우선 아이는 뜻밖에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이베리아반도의 인색한 공중화장실과 살벌한 치안 문화를 알수록 그녀는 대한민국이 최고라는 사실을 거듭 상기시켰다. 한국과 한국인을 떠나오고자 유럽으로 왔는데 아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매우 그리워했다.
유럽에서도 물 흐르듯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을 몇 차례 보여준 춘은 아마도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과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베이징 좁은 후통에 이어 세비야의 미친 뒷골목에서도 먹히던 운전 실력은 회사를 때려치워도 먹고는 살겠다는 희망을 선사해 줬다.
오랜만의 유럽 여행에 '많이 보고, 배우고 올테다'라고 열정 가득했던 마흔의 나는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은 함께 하는 시간,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필수적인 준비물은 너그러움과 개취존 정신이라는 것도. 그것이 유네스코 문화유산 앞에서 '요즘 초딩들이 좋아하는 영상과 춤'에 대해서 끝없이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를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유다.
또 하나의 수확은 셋이 떠났지만 꼭 붙어 다닐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다. 아침과 밤을 적절하게 활용해 자유 시간을 가지니 각자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이 되었다. 인생에도, 일상에도 그러니 당연히 여행에도 혼자만의 시간과 고독은 필수적이다. 채사장이 <열한 계단>에서 말했듯,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리워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고, 아무 말도 없이 깊은 내면으로 고독해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함께 행복하기 위해, 혼자 고독해질 시간을 허락하기. 아주 간단하지만 중요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여행 10일차가 넘어가자 체력적으로 지친 우리는 조금씩 다른 시간에 피곤해졌다. 한 명이 피곤해하면 나머지 둘이 한 팀이 되어서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지치면 나머지 둘이 으쌰으쌰해서 에너지를 만들었다. 셋의 여행은 이것을 반복하는 과정이었는데 마치 어딘가 촬영 감독이 있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지친 사람 1'에서 '에너지 끌어올려 옆 사람에게 전달하는 오지라퍼 1'로 배역을 주고 받으며 열연하는 모양새였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할 앞으로의 '생'도 꼭 이런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정확히 3주 만에 다시 핀에어를 타고 핀란드 헬싱키로 향한다. 핀에어는 역시 블루베리 주스와 기내식이 맛있다. 늦은 시각 헬싱키 반타 공항 근처 호텔 <스칸틱>에 도착했다. 벙커 침대가 있어서 심이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호텔에 덴탈 키트와 슬리퍼가 없었다. 문의를 했더니 아주 친절하게 각 5유로에 구매하시면 된다고 했다. 레이트 체크아웃이 혹시 가능한지 여쭸더니 아주 친절하게 한 시간에 10유로라는 대답이 왔다. 핀란드는 역시 빈틈없고 그래서 약간 매정하다는 인상을 준다.
건축물 대상을 받아야 할 것 같은 헬싱키 반타 공항에서 마지막 비행을 기다리며 조금 쓸쓸한 마음으로 최민석 작가의 문장을 읽었다. 여행의 마지막에 공항에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접어둔 페이지다.
-여행을 끝내고 공항에 도착하면, 언제나 조금은 쓸쓸해진다. 떠날 때가 되면 아쉬움이 습지의 안개처럼 짙게 마음 바닥에 가라앉는다. 여행을 만족할 만큼 했으면 필시 이 여행이 그리워질 테니 아쉽고, 여행을 맘껏 하지 못했으면 이대로 물러나는 게 아쉽다. 그렇기에 공항에서는 미처 오지 않은 그리움까지 미리 겪는다.
최민석, 기차와 생맥주
이 문장을 읽으니 거대한 그리움이 핀란드의 사슴떼처럼 밀려온다.
3.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3주간의 여행이 전생처럼 아득하다. 우리에게 남은 현실은 천만 원이 넘는 카드빚과 한 달 만에 자리가 차 버린 심이 학원, 아마도 쉽게 끝나지 않을 학원 레벨테스트다. 역시 장기 여행의 후폭풍은 세구나!!! 생각하며 자중하는 것이 맞겠는데... 나는 이 여행을 쉽게 끝낼 생각이 없다. 몇 년 전부터 내 여행은 실제 여행 기간보다 훨씬 길어졌는데 여행이 끝나고 다시 그 도시를 나만의 방법으로 음미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고도 시안에 다녀와서 병마용과 양귀비의 이야기를 샅샅이 검색했던 것처럼 나는 다시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유럽 역사책을 잔뜩 빌렸다. <스페인, 포르투갈 100배 즐기기>를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는 나를 본 심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왜 스페인 여행 소개 책을 다시 보고 있어?"라고 물었다. 가이드북을 다시 읽으니 여행 전에 읽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 맛집 리스트를 보며 이곳은 꼭 가봤어야 했는데 아쉽다며 입맛을 다셨고, 여행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작가의 코멘트를 더 완벽하게 이해했다. 책 속의 장소를 찾아, 그 도시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하나하나 넘겨보기도 했다. 여행서의 유명한 바이블이 된 '100배 즐기기'에 담긴 뜻을 이제야 알 것도 같다. 여행을 준비하며, 진짜 여행 속에서,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쉽게 여행을 마무리하지 않아야 비로소 여행을 100배 즐긴 것이다.
그렇게 나는 돌아온 지 3일 만에 다음에는 체코 프라하를 걷고 싶다고 생각하며 체코행 비행기 티켓을 검색했다. <유럽 도시 기행 2>에서 유시민 작가가 묘사한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품고 있는' 프라하의 공기를 나도 맡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든 자유는 네 안에 있다'라고 페소아 선생님이 꾸짖는 것만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이 여행을 나만의 방법으로 준비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곳을 걷고 있을 것이다.
4.
가끔 앞에 앉은 사람에게 어디에 쓰는 돈이 아깝지 않냐고 묻곤 한다. 어쩌면 그것이 그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친구는 가방, 어떤 친구는 음식, 어떤 친구는 피부, 어떤 친구는 배움, 어떤 친구는 투자였다.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개별적이고 특별한 각자만의 답만이 존재한다. 내 대답은 오랫동안 여행이었고, 나는 여행을 위해 다른 것들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기 전 그레고리우스 교수가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속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 역시도 여행 내내 이 강렬한 질문을 품고 있었다. 그러게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내 안에 있는 것들도 코딱지만큼만 경험할 수 있다니... 억울함마저 밀려오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끝내 찾기가 힘들었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미처 알지도 못한 채 끝나버릴 위험에 처한 '그것들'을 조금이나마 더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 우리가 편견을 무기 삼아 가지고 있던 세계의 벽을 조금이나마 무너트리는 것이 여행이 아닐까. 여러 겹의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지는 무수한 '맞닥뜨림'과 그 안에서 느낀 다양한 감정들을 통해 내 안의 세계와 마음이 조금씩 넓어졌다.
매일 새롭게 나를 궁금해하고, 나를 둘러싼 세계와 이웃을 궁금해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여행에 끝에서 마주한 아주 어렵고도 소박한 나의 바람이다.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