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이유는 바로 너

제대로 '사랑'하기

by 심루이


1.

다소 늦게 브런치스토리에 이베리아반도 여행기를 썼다. 이 글의 타깃 독자는 한 명인데 바로 '스무 살이 된 심이'다. 청년이 된 심이가 이 글을 읽으며 오래전 삼총사가 했던 좌충우돌 여행기를 즐겁게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 모든 기록의 중심에는 심이와 가족이 있다. 몇 년 전 기록을 제대로 시작하게 된 계기도 언젠가 내가 아이를 떠나도 이 기록들이 아이에게 오래 말 걸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었으니까. 기록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값지지만 누군가를 위한 다정한 기록이 된다면 훨씬 더 근사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으로 빚어진 한 달 공백으로 학원 세팅을 다시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다가 뒤늦게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쓰려니 어려웠다. 머리를 쥐어뜯는 나를 보고 깔깔거리는 심이에게


-스무 살이 되어서 꼭 읽어줘야 돼, 그걸 위해서 엄마가 쓰는 거거든. 엄마가 사라져도 엄마의 비루한 기록들은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을 거야.


라고 비장하게 말하며 '엄마 기록의 이유는 모두 너다'라고 했더니 울컥한 심이가 말했다. (감성 충만 F가 분명한 심이)


-엄마, 오래 살아.

(예전에 썼던 문장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럼, 죽어도 죽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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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어도 죽지 않을 생각이지만 무언가를 쓸 때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기록한다. 인생은 재난과도 같은 것이니까, 불행은 도처에 깔려 있으니까, 그런 삶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지금은 즐기고, 기록하는 일이다.


내 기록들이 아이에게 구원은 되지 못할지라도 삶을 감당해보자고 결정하는데 눈꼽만큼의 도움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아니어도 어쩔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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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지도. 다른 집 아이, 다른 집 남편에게는 칭찬도 잘하고 너그러운데, 정작 내 사람들에게는 잔혹한 잣대를 들이대며 엄격해졌던 기억. 여행의 어느 오후, 나는 잘 모르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를 관찰해 보기로 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봤더니 시도 때도 없이 춤을 추는 아이가 참 건강해 보였다. 때로 예민하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그만큼 잘 배려하고, 무엇보다 포르투갈의 해산물을 참 맛있게 먹고, 깊이는 부족하지만 속도는 빠르며, 자발적으로 책을 잘 읽지 않지만 또 함께 읽는 시간에는 깔깔거리며 책에 빠져드는 점도 많이 칭찬해 줘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자아분열과 유체이탈의 과정을 통해 내 아이가 훨씬 근사하고 멋진 청소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허지웅 작가는 <최소한의 이웃>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소유'인 것 같다며, 상대를 통제하려다 관계를 망친다고 진단했다. 맞다. 아이는 내 소유가 아니며 그저 (나를 시험하러 먼 곳에서 찾아온) 하나의 독립된 우주다.


허 작가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었다.


-여러분은 지금 사랑하고 계시나요, 소유하고 계시나요.


이 질문이 폐부를 뚫을 듯 강렬하다면 더더욱 잊지 말자, 제대로 '사랑'하기.

그냥 결심하자. 지금 당장 그렇게 해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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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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