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풍경에 기꺼이 배경이 되어주는 순간들
1.
언제나처럼 도시의 아름다움을 완성시켜 주는 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일상과 우리의 여행이 미묘하게 겹쳐지고, 혹은 어디에서 온 지도 모르는 각자의 여행이 교차되며 시간은 더 천천히, 아름답게 흘러간다. 어쩌면 서로의 풍경에 기꺼이 배경이 되어주는 그 순간이 좋아서 나는 여행을 한다. 그곳에 있는 입이 벌어지는 풍경보다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러 여행을 한다.
여행이 끝난 뒤 다른 어떤 사진들보다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나와 찰나를 공유한 이들의 사진을 더 자주, 오래 바라본다.
2.
포르투 히베이라 광장 근처에서 만난 공연의 퀄리티는 굉장했다. <플라이보이즈 크루>라는 이름을 가진 네 명의 남성 그룹이었는데 엄청난 댄스와 적절한 유머가 버무러진 한 편의 멋드러진 쇼였다. 모자에 공연료를 조금이라도 넣고 싶었는데 여행 막바지라 여유 현금이 없었다.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인상 좋은 웨스턴 할아버지가 심이에게 10달러를 주며 자기 대신 모자에 넣어 달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쭈뼛쭈뼛 심이가 모자에 10달러를 넣고 오자 그 누구보다 크게 환호성을 질러 주시기까지 했다.
춘에게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나도 저렇게 10달러를 재미있고 멋있게 쓸 수 있는 할머니로 늙고 싶다.
포르투갈로 넘어 가자 아시아 사람들이 드물었다. 가끔 누군가 우리를 보며 반갑게 중국어 혹은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우리가 웃으며 '코리안'이라고 대답하면 다행히 북쪽인지 남쪽인지는 묻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 질문도 꼭 이어졌던 것 같은데. 이럴 때마다 BTS의 파워를 강하게 느낀다. 그래도 절대 '두유 노 김치'에 버금가는 '두유 노 BTS'라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하자.
3.
'풍경이 풍경이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고 '여행이란 결국 여행자 자신'이라던 페소아의 말을 반박할 수 없는 순간이 많았는데 핀란드의 브런치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나의 아빠를, 네르하 파라도르 선베드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누워 있는 할머니를 보며 나의 엄마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알람브라 궁전 벤치에서 나란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노부부에게서 나와 춘의 미래도 그려봤다. 낯선 곳을 여행하며 사랑하는 이들과 나의 과거와 미래를 본다.
우리는 어쩌면 내 안에 발견되지 못한 채 묻혀 있던 풍경을 만나러 여행을 떠난다.
4.
둘, 하나 나눠서 사진을 찍고 있으면 먼저 다가와서 "너희 셋 가족사진 찍어줄까?"하고 먼저 말을 걸어주시는 분들이 있었다. 셀카봉이 있었지만 주로 가방에 넣고 다녔고, 각자 마음에 드는 풍경을 정신없이 찍느라 세 명 사진이 생각보다 없었기에 그들의 이런 호의는 참 반가웠다. 무엇보다 그것을 먼저 물어봐 주는 그 너른 마음에 감탄했다.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일은 쉽다. 하지만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을 먼저 권하는 친절한 마음은 어렵다. 여행의 후반부에 우리는 다른 목표가 생겼다. 먼저 다가가서 사진을 찍어드리는 것. 다정을 먼저 건네보는 것.
허지웅 작가는 <최소한의 이웃>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줄 전능한 힘 같은 건 없지만, 적어도 비참하게 만들지 않을 힘 정도는 가지고 있'다고. 이 성찰은 꽤 색다른 위로를 안겨줬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타인에게 바라는 이웃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을 것인지를.
먼저 다가가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내게 여행은 타인에게 조금 더 친절해지자고 여러 번 다짐하는 일, 최소한의 이웃이었던 나를 조금 더 용감한 이웃이 되게 하는 시간이다.
이방인인 우리도 서로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존재고, 그 따뜻함은 때로 기대보다 훨씬 힘이 세다. 머리에 흰 머리가 늘어갈수록 이 세상에 '다정'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