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1.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녁 음주 가무가 줄고 아침 시간이 늘어나는데 요즘 느끼는 것은 여행의 백미는 인적이 드문 고요한 아침이라는 것이다. 새벽의 도시는 마치 메이크업을 지운 얼굴처럼 날 것 그대로의 생기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셋이 함께 했지만 철저하게 각자 자유시간도 가졌다. 주로 아침 일찍 내가 산책을 하고, 늦은 밤, 춘이 나가서 밤의 이베리아반도를 즐겼다. 그럴 때면 심이도 호텔 침대에서 뒹굴며 자유를 만끽했다. 매 순간 함께 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나니 여행이 훨씬 더 즐거워졌다. 코르도바, 그라나다, 세비야, 포르투 등 내게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남겨 준 도시는 모두 혼자 오래 걸었던 곳이다.
2.
단독 산책에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투어라이브 오디오 가이드였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 한 일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오디오 가이드는 합리적인 가격과 자유 시간을 보장해 주면서 깊이까지 있었다. (매 도시 가이드 현장 투어를 했다면 경비가 훨씬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첫 번째 오디오 투어는 <세비야의 건축가와 함께 하는 코르도바 메스키타 투어>였다. 처음에는 메스키타의 역사나 의미를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콘텐츠인 줄 알았는데 가이드 투어와 마찬가지로 투어 시작 장소가 있고, 추천 동선이 있었다. 이른 아침 메스키타에 들어가 재생 버튼을 눌렀더니 세비야 건축가님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친절하게 설명해 주더니 "다음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웬 신세계인가... 감탄하며 건축가님이 추천해 주는 동선을 신나게 졸졸 따라다녔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한 번 더 들으며 학구열을 불태웠다. 다음 날에는 춘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어제의 내 동선을 따라가는 동안 나는 건축가님이 알려주신 내용을 활용해 심이에게 한껏 잘난 척을 하고 있었다. 건축대학 출신답게 콘텐츠가 굉장히 전문적이고 목소리와 딕션도 좋아서 설명이 귀에 쏙쏙 꽂혔다.
반신반의했던 첫 번째 투어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기에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도 과감하게 현장 투어를 포기하고 오디오 투어를 선택했다. 25,000원으로 다른 오디오 가이드에 비해 저렴한 가격은 아니지만 전체 56개 트랙, 3시간에 육박하는 콘텐츠라 전혀 아깝지 않았다. 현장 가이드가 대부분 인당 6만 원이 넘는다고 생각해 볼 때 싸게 느껴질 정도였다. 티켓 예매 방법, 관람 꿀팁은 물론 역사, 자연, 건축, 재료, 언어 등 전문적이고 방대한 지식이 담겨 있었던 미리 듣기가 무려 25개여서 나는 알람브라 궁전에 가기 훨씬 전부터 이사벨 여왕에 빙의되어 그곳을 걷고 있었다. 알람브라 궁전 투어를 다녀오고 나서 한 번 더 반복해서 들으니 색다른 맛이 있었다.
그 외에도 세비야, 론다, 리스본 등 거의 모든 도시에서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했다. 도시를 이동하는 차 안이나, 아침에 외출 준비를 할 때는 크게 틀어두고 다 같이 들었다. 이처럼 오디오 가이드는 다른 차원의 재미를 선사해 줬다.
* 혹시 투어라이브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실 분들은 쿠폰 코드에 <impoem104>를 입력하면 1,000원 할인이 가능하다.
3.
혼자만의 시간과 도시 애정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여행의 막바지에 우리는 조심스레 제일 좋았던 도시 3-4개를 꼽아보기로 했다. 우리에게 다정한 위로의 시간을 선물해 준 포르투는 예상대로 모두가 좋았다고 손꼽았고(포르투는 내게 이번 여행 최애 도시였다.), 안달루시아 매력의 정수를 보여주는 도시 세비야도 공통 리스트에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도시는 모두 달랐다. 심이는 롯데월드 어드벤처 뺨치는 퍼레이드를 보여줬던 축제의 도시 말라가를, 나는 인생 일출을 선물해 준 코르도바를, 춘은 타파스바 투어를 한 그라나다를 꼽았다.
내게 코르도바가 좋았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심이가 미열로 호텔에서 쉬어야 하는 동안 제일 오래 '혼자' 걸었던 도시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침 산책을 하며 인생 일출을 본 것은 물론 저녁노을을 풍경 삼아 로마교 벤치에서 버스킹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로마교 위에서 노래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아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렇다면 춘의 그라나다는 어떤가. 춘은 그라나다에서 타파스바 나이트 투어를 했다. 주류를 시키면 무료 타파스 한 접시를 제공해 주는 그라나다의 멋과 관용을 온몸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여행의 경험은 이토록 개인적이며 고독한 성질의 것이다. 우리는 각자 꼽은 도시 목록을 살펴보며 낄낄거렸다.
4.
그런 연유로 "이번 여행은 이동을 너무 많이 해서 힘들었지? 다시 3주 여행 일정을 짠다면 어떤 도시를 빼야 할까?"라는 질문의 정답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난상토론을 하다 보니 각 도시마다 뺄 수 없는 이유들이 가득했고 자신들의 최애 도시들을 지키기에 분주했다. 경험하지 않고는 뺄 수 있어도 경험하고 나면 결코 놓치기 힘든 다양한 매력들을 각 도시들은 보유하고 있었다.
여행 전에 내가 이베리아반도 장기 여행을 한 사람에게 그토록 하고 싶었던 질문, "당신의 최애 도시는 어디였나요? 제 일정 보고 잔소리 좀 해주세요." 또 딱히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카페와 블로그에 후기를 올리고 나서 나도 이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았다) 내게 가장 좋았던 포르투를 어떤 이는 '폐가가 너무 많아서 별로'라고 평가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최악의 도시가 당신에게 최고의 도시가 될 수도 있으니까. 도시에 대한 애정은 그날의 컨디션과 날씨, 경험,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버무려져서 나오는 것이다.
첫날 내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던 두 번째 세비야는 메트로폴 파라솔 앞 카페에서 만난 한 직원의 미소와 친절 덕분에 잊을 수 없는 시간을 선물해 준 도시가 되었고, 포르투가 더 다정하게 느껴졌던 건 버스킹 공연을 함께 보던 웨스턴 할아버지가 심이에게 자기 대신 그들의 모자에 10달러를 넣어달라고 부탁한 즐거운 에피소드가 얹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아주 짧은 순간에 도시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5.
혼자 걷는 게 그렇게 좋으면 그냥 쭉 혼자 걸을래?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대답은 노! 절대 고독을 경험하고 나면 비로소 깨닫게 된다. 혼자만의 시간이 한없이 달콤한 이유는 돌아갈 곳과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임을. 아침 산책을 행복하게 마무리하고 나는 더욱 행복한 마음으로 춘과 심이가 뒹굴거리고 있는 호텔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여행이 행복한 이유는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한다면 우리는 조금 더 현명한 여행자가 될 수 있다.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