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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혜 Feb 27. 2023

프롤로그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때는 한류열풍이 불기 전이기도 했지만 대한민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반 친구들의 반응에 큰 충격을 받고 왠지 모를 창피함과 서러움에 집에 돌아와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애국심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대안이 생각나지 않는 이름 모를 작은 다짐이 그때부터 내 마음속 한 켠에 자리 잡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중학교 시절부터 꿈꾸었던 국제회의 통역사가 되었고, 통역사로 일했던 지난 십여 년 동안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우리나라가 언어장벽 때문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데 기여하고 싶었다.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에서 일하는 동안 우리나라 외교관 분들이 FTA협상장에서 국익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고,  


협상장에서 내가 밀리면 우리나라가 밀리는 거야


라고 하셨던 한 과장님의 말씀은 내 마음에 쿵 하고 와닿아 지금도 가끔 내 마음속에서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같은 과에서 근무하던 변호사 분들이 우리나라가 제소당한 통상분쟁에서 승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모습들 또한 내게는 꾸준히 자극제가 되어 주었다. 결국, 나는 우리나라가 지지 않도록 돕고 싶었다.


정부기관이나 국제기구에서만 일을 하다 처음으로 민간분야로 나온 것이 2016년이었다. 그동안에는 국가와 국가 간의 협상이나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다자 회의와 관련된 일들만 하다가 처음으로 정부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는 사기업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게 되었고, 또 한 번 내 시야가 한층 트이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차원에서 대외적으로 우리나라의 국익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 못지않게 국내 기업이 다른 나라 기업과의 경쟁에서 부당하게 밀리거나 손해를 보지 않도록 돕는 것 또한 궁극적으로는 같은 맥락에서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른 다음에는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지난해 한 정부부처에서 발주한 용역 프로젝트에 국제법 교수님 한 분 그리고 박사 선후배들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참여하는 FTA 중 특정 챕터의 협상 대응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프로젝트 초반에 우리 연구진은 그동안 우리나라가 체결한 FTA 협정문 조문을 비교분석한 다음 담당 공무원 분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우리가 세운 협상 대응 전략을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다. 나는 무척이나 긴장되었지만 열심히 준비한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그런데 담당자 한 분이 대뜸


사소한 영어 표현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중요한 것부터 설명해 주시죠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사.. 소.. 한..”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FTA 협상은 결국 협정문에 어떤 단어나 표현으로 당사국의 권리 및 의무관계를 규정해 둘 것인지를 두고 다투는 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단어 하나, 또는 심지어 콤마하나를 두고도 두세 시간씩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협정문과 같이 법적 구속력이 있는 문서에 포함된 단어 하나하나의 해석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협상을 담당하시는 분이 협정문에 들어갈 영어 표현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고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기도 했고 동시에 걱정되기도 했다.


하루는 이 프로젝트와 관련된 회의를 오전에 마치고 오후에는 이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모 대기업의 국제법무팀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기업의 해외 지사가 있는 국가의 검찰 조사에서 소명해야 할 이슈가 있었고,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해외 로펌 변호사 팀과 함께 논의하는 자리였다. 검찰 조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기업 제품의 판매율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에, 회의 분위기가 상당히 엄중했다. 당연히 우리나라와 그 국가 모두가 당사자인 관련 협정 또는 협약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회의를 듣는 내내 “사소한” 영어 표현이라고 말했던 모 부처 담당자분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분이 사소하다고 여겼던 영어 표현 하나하나의 해석에 따라 이 기업처럼 해당 협정의 구속을 받는 모든 우리 국내 기업들은 어마어마한 금액의 비용을 들여 다른 당사국과의 분쟁에 대응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법률문서는 단순히 읽혀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실제로 적용되는 문서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다른 나라와 체결한 협정이 국내 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수업시간에 공부했던 판례를 통해서가 아닌 직접 내 눈으로 목격하고 나니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여러 개의 퍼즐들이 한 곳으로 모이듯 생각이 정리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 영어와 법률 맥락에서 사용되는 영어는 그 사용법이 다르다. 따라서, 평소에 우리가 영어를 공부하고 사용할 때와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법률이 적용되는 영역에서는 조문에 포함된 단어 하나의 해석에 따라 피고인의 유무죄가 판가름나기도 하고, 기업 간의 소송에서는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내야 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모르면 손해를 볼 수 있고, 알아야 지지 않는다.


비단 법률분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말만 통하면 된다고 생각해도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평소에도 보다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영어를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다면 영어는 각자의 위치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법률영어 연구소를 만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영어를 대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모두가 이전과는 달리 보다 더 똑똑하게 영어를 쓸 수 있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고 이길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영국의 한 작은 고등학교 교실에서 내가 느꼈던 창피함이 작은 불씨가 되었고, 통역사로 일했던 지난 십여 년간의 경험,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한 국제법, 결국에는 한 곳으로 귀결된 수많은 경험들을 통해 내가 생각하고 깨달은 것들 이 모두가 각각 하나의 퍼즐이 되어 <법률영어 연구소 아우디오 랩>이라는 결과물로 합쳐졌다. 아직은 작은 연구소지만 앞으로도 더 많이 연구하고 경험해서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래서 긍정적으로 이 세상에 기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내 삶을 믿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202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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