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 위스콘신주 커노샤 카운티에서 과격한 시위가 벌어졌다. 17세였던 카일 리튼하우스는 불법으로 구매한 AR-15 소총을 들고 시위장소로 갔다. 자경단을 자처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카일 리튼하우스의 행동으로 인해 결국 두 명이 사망하고 한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스콘신주 커노샤 카운티 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배심원단은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평결을 내렸고, 이는 많은 논란으로 이어졌다.
[사진 출처: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재판과정에서 사용된 영어표현이다. 다음은 해당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와 변호인의 대화이다.
Judge Schroeder: (09:23)
All right. The motion of the defendant is granted. The charges against the defendant on all counts are dismissed with prejudice and he is released from the obligation of his bond. Anything else?
Mr. Richards:(09:35)
No, Your Honor.
판사는 피고인의 신청(motion)을 받아들여 피고인에 대한 모든 혐의를 기각한다고 하면서 dimissed with prejudice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동시에 추후에 다시 소송이 제기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우리나라 회사가 연루된 케이스도 있다. 2017년 제약회사인 메디톡스는 대웅제약을 상대로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법원에 영업비밀침해를 이유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대웅제약이 메디톡스의 보툴리눔 균주와 기술을 도용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오렌지카운티 법원은 한국에서 같은 사안으로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이유로, 불편한 법정의 원칙(forum non conveniens)을 원용해 소송을 각하(dismiss)했다. 이 원칙은 같은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국가의 법원이 동시에 재판관할권을 가질 경우, 한 국가의 법원이 재판을 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판단이 되면 다른 국가의 법원이 재량에 따라 해당 소송에 대한 재판관할권을 행사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도록, 즉 해당 소송을 각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오렌지카운티 법원이 그러한 판결을 내리면서 사용한 표현이다.
[판결문 원문 출처:
https://www.medicaltimes.com/Main/News/NewsView.html?]
판결문 원문에서 해당 법원은
The Daewoong Defendants are hereby dismissed without prejudice on the grounds of forum non conveniens.
라는 문장을 사용했는데, 이 문장에 포함된 dismissed without prejudice라는 표현을 두고 두 회사의 해석이 엇갈린 것이다. 이전 챕터에서 살펴본 것처럼 without prejudice는 원고가 소송을 다시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쉽다. 메디톡스는 이 표현이 ‘재소가능한 각하’를 뜻하기 때문에 메디톡스가 다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뜻이고, 따라서 오렌지카운티 법원이 각하 판결의 이유로 언급한 한국에서 지금 진행 중인 소송이 종결되면 재소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대웅제약은 오렌지카운티 법원이 판결문을 통해 명시적으로 한국에서 소송이 진행되도록 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 법원에서 최종판결이 나오면 이 소송은 완전히 종료되며 같은 사안으로 메디톡스가 미국에서 다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한편, 2023년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대웅제약이 메디톡스의 보툴리눔 균주를 불법으로 취득 및 사용했다고 판단했고, 대웅제약이 메디톡스에 400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이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판결문에 사용된 표현의 해석에 따라 원고가 소송을 다시 제기할 수 있는지 여부가 달라지고, 만일 재소가 가능한 것으로 판단이 내려져 한국에서 진행 중이던 재판이 종료된 후 메디톡스가 미국에서 실제로 다시 대웅제약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면 두 회사의 운명이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법정 스릴러의 거장 마이클 코넬리가 쓴 소설 <The Law of Innocence>의 한국어판이 출판되었다. 매튜 매커너히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의 원작으로도 유명해 많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아는 변호사님의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게 되었는데, 바로 그 소설 한국어판의 오역을 지적하는 내용이 흥미로웠다. 그 포스팅에 따르면 원문에는 영어로
"withdrawing the charge with prejudice... "
라고 되어 있는 것을 한국어로는
"지방검찰청이 편견을 갖고 제기한 공소를 취하할 것이고 … "
로 번역이 되어 있다고 한다. 이제 이 번역이 왜 잘못되었는지 쉽게 눈치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을 출판한 곳은 법정 소설을 출판한 경험이 많은 출판사이기도 하고, 이 책을 번역한 분도 마이클 코넬리가 쓴 소설을 다수 번역한 베테랑 번역사라고 하는데도 이런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평소에 본 적 없는 어려운 단어의 경우 오히려 잘못 번역할 가능성이 낮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모르는 단어는 찾아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prejudice처럼 평소에 잘 알고 있는 단어일수록 내가 알고 있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고 예단하기가 쉽다. prejudice 외에도 쉬운 단어이지만 법률 맥락에서는 일반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여 특정 법률효과를 발생시키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잘 알지 못하면 잘못된 해석을 하게 되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내게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알아야 손해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