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내게는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단어인 indicate가 다시 한번 언론에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지난 정권 말,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해양에 방류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에 수산업 종사자분들을 포함한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불안과 우려가 계속되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신임 주한대사와의 환담식에서 아이보시 고이치 당시 주한 일본대사에게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우려를 본국에 잘 전달해 달라는 말을 했다. 보통 대사 신임장 제정식 후 가지는 환담 자리에서는 하지 않는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여기서 indicate가 등장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회의에서 국제해양법재판소(International Tribunal for the Law of the Sea, ITLOS)에 제소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또한, 잠정조치를 요청하는 것을 동시에 검토하라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잠정조치는 보통 국제재판소의 최종 판결이 나오기까지 수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일본이 오염수를 방류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일종의 가처분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안을 제소할 재판소로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CJ)가 아닌 국제해양법재판소를 선택한 배경에는 바로 이 단어 indicate가 있었다.
국제해양법재판소는 유엔해양법협약(UN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에 따라 설립된 국제재판소이며, 따라서 해양법협약을 근거로 판결을 내리는 반면, 국제사법재판소는 국제사법재판소규정(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 잠정조치에 관한 이 두 조약의 조항을 각각 비교해 보자. 먼저, 국제사법재판소규정 제41조에서는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Article 41
1. The Court shall have the power to indicate, if it considers that circumstances so require, any provisional measures which ought to be taken to preserve the respective rights of either party.
제41조
1. 재판소는 사정에 의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각 당사자의 각각의 권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취하여져야 할 잠정조치를 제시할 권한을 가진다.(강조추가)
즉, 재판소가 잠정조치를 제시할 권한을 가질 뿐인 반면, 해양법협약에서는
Article 290
Provisional measures
1. If a dispute has been duly submitted to a court or tribunal which considers that prima facie it has jurisdiction under this Part or Part XI, section 5, the court or tribunal may prescribe any provisional measures which it considers appropriate under the circumstances to preserve the respective rights of the parties to the dispute or to prevent serious harm to the marine environment, pending the final decision.
제290조 잠정조치
1. 어느 재판소에 정당하게 회부된 분쟁에 대하여 그 재판소가 일응 이 부나 제11부 제5절에 따라 관할권을 가지는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 그 재판소는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각 분쟁당사자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하여 또는 해양환경에 대한 중대한 손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 상황에서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잠정 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
재판소가 잠정조치를 명령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따라서, 만일 두 재판소 모두 우리의 손을 들어준다고 가정했을 때 국제사법재판소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잠정조치를 ‘제시’하는 경우와 해양법재판소가 일본 정부에 잠정조치를 ‘명령’하는 경우를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당연히 후자의 경우에 일본 정부가 더 큰 부담을 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최지현 제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쓴 논문 <국제해양법재판소와 국제사법재판소의 잠정조치에 관한 비교 연구>에서도
지시한다(indicate)’라고 규정한 ICJ와 달리 ‘명령한다(prescribe)’라고 규정해 더 강한 구속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해양법재판소의 판결을 일본이 따르지 않을 경우 해양법재판소가 UN안전보장이사회에 제재를 요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본 정부로서는 해양법재판소의 판결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는 우리 전 국민의 건강과 직결된 매우 중차대한 국가 사안인데,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조약에 포함된 단어 하나의 해석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양법협약이나 국제사법재판소규정과 같은 조약은 법적 구속력을 가지기 때문에, 단순히 읽히고 끝나는 소설이나 기사, 보고서 등의 일반문서와는 달리 실제로 적용이 되는 문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약과 같은 법률문서에 포함된 단어 하나하나의 해석이 이렇게 중요하고, 이와 같은 내용을 잘 알지 못한다면 국제분쟁에서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국민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