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icate를 영한사전에서 찾아보면 “나타내다, 보여주다, 시사하다” 등의 뜻을 가진다고 나와있다. 크게 복잡할 것 없어 보이는 이 단어 하나가 무려 3억 원짜리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필자는 2011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소속 인하우스 통번역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한미 FTA에 따른 쌀 시장 개방 여부가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였는데,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2007년 8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서명 직후, 얼 포머로이 미 하원의원과 나눈 대화가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되어 우리 팀에서도 그 일부를 내부용으로 한국어로 번역을 한 적이 있다.
그 후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해서 건물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로비에 설치된 TV화면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려는 바로 그 순간 익숙한 내용이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얼마 전 번역한 바로 그 문서를 두고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한겨레신문사와 그 소속 기자를 상대로 명예훼손 혐의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었다. 허위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하며 3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했다는 내용이 보도되고 있었다.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우리가 번역을 잘못했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서둘러 사무실로 올라가 PC를 켜고 파일을 열었다. 정확히 어떤 단어로 번역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확인했을 때 번역이 잘못되지는 않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던 것은 분명히 기억난다. 그 일로 검찰에서는 이 문서를 직접 번역한 사람을 소환했는데 감사하게도 당시 우리 부서의 과장님이 우리 팀 대신 조사를 받으러 가셨고, 결국 우리가 한 번역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은 저녁 과장님의 걱정 말라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우리는 안심할 수 있었다.
[사진 출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
번역이 문제가 되었던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Kim indicated that the ROKG would revisit the rice issue once the 2004 WTO arrangement on rice quotas expired in 2014.
이 문장에서 김종훈 본부장이 한국 정부가 2014년에 쌀 문제를 다시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indicate 했다고 표현한 것을 한겨레신문은 “약속했다”라고 번역해서 보도했고, 이를 두고 김종훈 본부장은 약속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므로 허위사실을 적시함으로써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담당 재판부는 “약속했다고 해석될 수 있는 직접적인 표현이 없고, 쌀 관세화 유예 기간이 종료되는 2014년 이후에 쌀에 관해 재논의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가능성을 언급한 것일 뿐인데도 한겨레신문사가 ‘약속했다’는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위키리크스 문건의 내용을 왜곡한 것”이라고 판시하며 허위사실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쌀 시장 전면 개방을 원하는 미국 정부로서는 김 전 본부장의 발언을 ‘쌀시장 개방에 관한 추가협상의 시사점’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며, 위키리크스 문건 역시 이를 우회적으로 시사하고 있음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므로 한겨레 보도가 악의적이라거나 심히 경솔했다고 보기 어려워 위법성이 조각된다”라고 보았고, 결국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2.5.16. 선고 2011 가합 116282 판결).
어떤 사건에서 원고가 청구한 손해배상금이 3억이라는 사실만 두고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지만, 그 이유가 오직 단어하나의 해석 때문이라면 어떤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지 채 1년도 안된 초보 통역사 시절에 직접 검찰 조사를 받을 뻔한 아찔한 이 경험 덕분에 단어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 습관을 일찍부터 기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