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강녘의 메밀꽃밭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었다.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푸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 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중략)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하다가 허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디었다.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위의 글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한 구절.
여름이면 얼음을 동동 띄운 시원한 메밀국수를 좋아하긴 하지만, 가을의 꽃인 메밀꽃이 이리 하얗고 고울 줄이야. '소금을 뿌른 듯이' 메밀꽃들이 하얗고 흐뭇하게 강어귀에 펼쳐져 있었다. '메밀 꽃 필 무렵'에서 조선달이 동이가 아들이란 것을 알게 된 마지막 대목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 모친은 아비를 찾지 않는 눈치지?"
"늘 한 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조선달은 노심초사하며 조심스럽게 동이에게 묻지만, 동이로선 영문을 알 턱이 없다. '이 양반이 왜 이러지'하며 진종일 실수하는 조선달이 의아할 뿐이다. 그 모습을 보다가 조선달은 기어코 웃음이 터진다. 독자도 같이 웃음이 터진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된다던데, 작가의 의도가 이것은 아닐 텐데...
아름다운 우리말에 대해 몇번이고 감탄하며, 자꾸 읽었다. 조선달이 "동행하려나, 동이"라고 그랬듯이, 그리 한마디 말을 건네고 싶다. 그 말은 길을 같이 가자는 말도 되지만 아들에 대한 아비의 일종의 프러포즈 아니었을까. 이 한 세상을 함께 '동행'하자며. 가을녘에 아름다운 메밀꽃들이 흐뭇하게 희고 고운 어휘로 피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