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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원 Apr 11. 2021

서울은 지하철이 좋아서 차가 필요 없어


 "서울은 지하철이 좋아서 차가 필요 없어." 친구는 약속 시간보다 15분 늦게 도착했다. 근처까진 제시간에 왔는데, 숲 입구 찾느라 늦었다고 말했다. 내가 화내려 하자, 친구는 오랜만에 탄 2호선 지하철에 대한 칭찬과 60개월 할부로 산 자신의 차에 대해 불평을 늘어놨다.


 "서울은 숲도 잘해놨네." 서울숲 초입에 펼쳐진 긴 가로수길을 보며 친구가 말했다. 우리가 살던 촌구석에도 없던 숲이 서울에 있다야. 이젠 서울이 시골스러움도 뺏어가는구나. 다 가져가면 우리는 어떡해? 우리? 나는 서울시민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닌 걸 가지고 화내는 친구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친구의 아이보리색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너는 공원 오는데 흰 바지를 입고 오면 어떡하냐.


 서울숲은 서울 같지 않다. 옆에 우뚝 서있는 (경기도민인 친구 말에 의하면) 최저가 27억 7천이라는 갤러리아 포레. 너무나 현대적으로 생긴 이 아파트만 아니었다면, 서울숲은 제주도 어딘가에 둘레길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천천히 걸었다. 연인들은 자전거를 타고 우리 옆을 지나쳐갔다. 아이가 엄마의 손을 놓고 혼자 멀리 앞서 갔다. 개들이 많았다. 하늘에 미세먼지가 없었다. 이상했다. 우리는 큰 나무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음식을 먹고, 얘기를 하고, 누워있었다. 평화로웠다. 너무 평화로워서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서울에서 평화라니. 이상하잖아.


 내가 빌린 캠핑의자에 앉아 우리는 한가로움을 즐겼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있다가, 친구가 말했다. "잘 지내냐?" 나는 멀리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를 봤다. 윤기 나는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최근 본 '지구 최후의 밤'에서 탕웨이가 입은 초록 실크 원피스가 떠올랐다. 나는 초록색이 좋다. 편안해서 좋다. 오늘은 머리 아픈 얘기하지 말자. "나는 파란색이 좋아." 친구가 말했다. 왜? 파란색은 실패하지 않거든. 그럼 파란색이 좋다는 거야? 실패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거야? 오늘은 머리 아픈 얘기하지 말자며. 아니면 뺏기고 싶지 않다는 거야? 너 무슨 일 있냐?


 빼앗기다. 나는 오늘 또 무엇을 뺏겼는지 고민했다. 이젠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교수님은 포기해야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교수님 말씀은 너무 교수님 말씀 같아. 또 겁주려고 저러나 보다 싶다가도. 그동안 내가 포기한 커피와 책들. 그리고 포기하지 못한 인형 뽑기와 코인 노래방 같은 지금 시대의 사치를 떠오르게 했다. "적당히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적당한 행복이라는 말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오늘 서울숲에서는 배움을 포기했다. 하지만 적당한 행복, 적당한 불행. 어느 것이라도 하루빨리 적응되길 바라며. 어제 사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 제목을 생각했다.


 친구와 노을을 보기 위해 근처 한강 다리로 걸어갔다.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웃기지 않냐? 서울 사는 너도 1시간 걸리고, 경기도 사는 나도 1시간 반이나 걸리는, 서울에 있는 숲 찾아다니면서, 노을을 본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해가 남산 타워 옆으로 지고 있었다. 남산타워가 서쪽에 있었나? 노을이 절정에 이르자 친구와 나는 아무 말 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지구 최후의 노을? 이 세계에서의 마지막 노을인 양, 노을이 너무 새빨갰다. 무서웠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감탄하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친구 얼굴에 노을이 가득했다. 내 얼굴에도 묻어있을 노을을 생각했다. 쁘지 않겠.   


 해가 지자 빠르게 추워졌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친구와 나는 덜덜 떨며 숲을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고 성수역에 도착했다. 친구는 강변역으로 가서 광역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나는 신림역으로 가야 해서 같이 2호선을 탔다.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갔다. 강변역에 다 와가자 친구가 주먹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조금 아팠다. 아직 우리 젊다. 웃음이 새 나왔다. 밝은 미래도 있냐? 없다고 하면 너무 슬프니까 있다고 치자. 친구는 먼저 내렸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이 한강을 지날 때. '서울은 지하철이 좋아서 차가 필요 없어.'라고 한 친구의 말이 떠올라, "서울은 지하철이 좋아서 차가 필요 없어." 라고 소리 내어 말했다. 갑자기 배가 고파져 들어가면서 저녁으로 뭘 사갈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세 끼를 다 챙겨 먹겠다. 찔렸다. 아직은 속이 젊어.


 출구를 나왔다. 누군가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항상 더 외로워졌다. 언젠가부터 이렇게 더 외로워질 것이 두려워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집 근처 골목으로 들어서며. 밤은 왜 이렇게 어두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 문 앞에 서면 항상 같은 질문을 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존재하는 것인가. 나에게만 없는 것인가. 발 밑엔 친구에게 답하지 못한 말들이 택배처럼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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