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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제이 Nov 25. 2022

우리 애들을 거기서 재울 순 없어

K는 저명한 외국계 출판사의 지사장이다. 그와 나는 어릴 때부터 30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다. 아내와 17년째 살고 있으니 그동안 내가 살아온 역사에 대해서는 아내보다 자세히 알고 있을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구다. 그와는 술 없이도 3박 4일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대화가 즐겁고 소재도 무궁무진하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많은 에피소드와 레퍼토리가 준비가 되어 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자동으로 재생되는 토크박스처럼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해도 막힘이 없다. 그가 곁에 있는 한 인생이 심심하진 않을 것 같다. K와 나는 결혼의 시기도 비슷하고 아이를 낳은 시기도 비슷했다.(내가 아기를 낳은 것은 아니고 아내가 낳았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정보도 교환하고 육아 노동에 대한 넋두리도 하면서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10년도 훨씬 지난 오래전 일이다.

K의 가족과 여행을 가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에 숙소를 정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충돌했다. 그는 5성급 특급 호텔을 원했고 나는 가성비 좋은 펜션에서 경제적인 여행을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나는 회사를 이직 중이어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상식적으로는 여행을 가면 안 될 정도로 경제적 부담감이 있었지만 처음으로 K와의 가족 여행이었고,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에 무리수를 둬서라도 여행을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의견을 조율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백방으로 인터넷을 뒤져서 가성비 좋은 숙소와 음식을 찾아서 그에게 제안 했지만 돌아오는 그의 대답은 너무 간결했다.

"형, 우리 애들을 거기서 재울 순 없어"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이 가끔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부모의 마음은 같다.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먹이고 싶고, 가장 좋을 것을 입히고 싶고, 가장 좋은 곳에서 재우고 싶다. 상황은 어려웠지만 그 시기가 아니면 K의 가족들과 추억을 만들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어렵게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었다. 그의 너무도 간결한 말 한마디에 그동안 여행을 계획하고 진행 보려고 애썼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우리들의 여행블루스는 끝이 났다.


그의 말이 많이 서운했던지 나는 K에게 한 동안 연락 하지 않았다. 힘들 때 그를 의지했고 나를 가장 잘 알고,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더 서운했었나 보다. 그 와 나는 혜화동의 호프집에서 호프 한잔을 시켜놓고 강냉이를 안주 삼아 먹던 사이였고, 그가 전단지를 배포하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 반 씩 나누어서 함께 일을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둘이 누우면 간신히 발을 뻗고 누울 수 있을 만큼 비좁은 방에서 내용도 없는 이야기를 밤새도록 나누며 새벽을 맞이하는 사이였다.


그 일이 있은 후 K의 가족 와 우리 가족은 단 한 번의 만남도 없었다. 물론 그와 둘이 만날 때는 예전처럼 소주도 마시고 캠핑도 갔다. 불혹의 나이에 외국계 출판사 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한 그는 운도 따랐고 실력도 있었다. 금전적으로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고 명예도 얻었다. 요즘 말하는 출세를 한 사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계급이라는 것을 알지만 살붙이 갔았던 그에게서 괴리감을 느끼니 머리가 복잡해지고 마음이 불편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와 나는 사는 세계가 다르고 급(級)이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서운한 마음은 없다. 하지만 세월이 한 참 더 흐른 후에 언젠가는 소주 한 잔 하면서 말하려고 한다.


"K야, 솔직히 형이 그때는 좀 서운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서운하더라"



당시 K의 상황도 이해한다. 이혼 후에 홀로 어린 두 딸을 키우며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는 고된 일상은 오죽했을까 싶다. 엄마의 부재로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해하지는 않을까? 이혼으로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까? 매일매일 고민하며 살았다. 그리고 딸들에게 경제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의 지갑에는 에버랜드, 캐리비안베이, 롯데월드등 3개 메이저 놀이동산의 연간회원권이 있었고 아이들을 위해 매주 한 번씩 번갈아 놀이동산을 다녔다.


아이들 때문에 고급 리조트의 회원으로 등록을 했고 여행을 다닐 때마다 최고급 숙소에서 잠을 잤다. 그토록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는 아빠였으니 소박한 펜션에서 북적 대며 흙을 만지게 하는 것이 싫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말을 조금만 이쁘게 할 수는 없었을까? 우리 사이에 그 정도의 배려심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물론 지금 다 잊었고 그 일로 서운한 마음은 정말 없다. 한 편으로 그런 생각도 한다. 내가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닐까? 너무 의지 한 것은 아닌가?


세상 일이라는 것은 그런 것 같다. 좋으면 좋지만, 좋지 않으면 좋지 않은 대로 매력과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호텔방은 호텔방의 즐거움이 있고 민박은 민박의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호텔이든 민박이든 내가 있는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여행은 어디서 무얼 먹느냐 보다, 누구와 무얼 먹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민박이든 호텔이든 상관없다. 그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 안다. 느낌은 다를 수 있지만 여행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진짜 사랑하지 않아서다.


가을이 점점 무르익어 간다. 10월에는 K와 단풍 트래킹 계획을 세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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