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잠자고 있는 아들의 곁에 조용히 누웠다. 그리고 아들의 뺨에 얼굴을 비비고 코를 비볐다. 아들은 여전히 사랑스럽다. 다 큰 아들에게 무슨 망측한 행동이냐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사랑스러우면 어쩔 수 없는 가 보다. 나는 스킨십의 즐거움을 부모가 되고 난 후에 아이들을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그동안 성(性)과 스킨십에 참 무지했던 것 같다. 과거에는 성(性)과 스킨십이 부끄럽고, 쑥스럽고, 어색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성(性)은 즐겁고 소중한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데 50년이 걸렸다.삶을 따뜻하고 풍요롭게 한다. 다시 태어나서 연애를 한다면 더 많이 스킨십을 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다. 내가 어렸을 때 기억하고 있는 스킨십은 약주를 한 잔 하신 아버지께서 볼에 뽀뽀를 해 주시는 정도의 스킨십이 있었을 뿐 진정한 스킨십의 의미는 잘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스킨십이 왜 좋은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진정한 스킨십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스킨십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면 조건반사적으로 따르게 되는 행위라는 생각 한다. "좋아하니까 스킨십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성(理性)의 문제지만, 생각을 하기 전에 몸이 저절로 움직이여서 반응을 하는 것이 본능인 것 같다.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가장 적극적인 몸의 언어가 스킨십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스킨십을 빙자해서 이성에게 껄떡대거나 추행을 하면 안 된다.그 순간 스킨십의 본질이 왜곡되는 것이다. 충동적인 스킨십과는 엄연히 다르다. 서로에게 진심의 느껴지면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감정은 충동이다. 연애를 할 때도, 부부사이도 마찬가지다. 자녀에게 느끼는 스킨십의 감정과 이성에게 느끼는 스킨십의 감정이 본질은 같지만 표현 방법은 달라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사랑하는 감정 하나만으로 스킨십이 가능하지만 연인이나 부부는 그렇지 않다.
어른이 되면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이성적으로 스킨십을 해야 한다. 연인도 부부도 원치 않으면 스킨십 불가(不可)다. 좋아도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고 스킨십을 해야 하는 것이 어른의 스킨십이다. 그래서 어른의 스킨십은 더 어렵다. 좋아도 참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조금 전까지도 좋았다가 지금 싫으면 스킨십을 할 수 없고 스킨십의 감정이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뽀뽀를 해 주던 딸은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다. 지금도 방에서 자고 있는 딸을 보면 볼도 쓰다듬어 주고 싶고 손도 잡아 보고 싶은데 이제는 그러면 안 된다. 딸은 몹시 놀랄 것이고 나도 어색하긴 마찬 가지다. 아내와의 스킨십은 유야무야(有耶無耶) 슬그머니 사라진 지 오래다. 아내도 본능적인 스킨십보다는 이성적인 스킨십이 충실한 사람이다. 나는 내가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스킨십에서만큼은 그렇지 않구나 하는 것을 요즘 느낀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스킨십의 즐거움을 알고 난 후 성향과 기질이 바뀐 건지는 잘 모르겠다. 부부도 더 친밀한 공감대를 위해 스킨십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성감대보다 중요한 건 공감대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남자들은 종종 성감대를 찾고 난 후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하는데 잘못된 판단이다. 아이들과도 커가면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마라탕도 먹고 탕후루도 먹어봐야 한다. 그래야 굳게 닫혀 있던 아이들의 말문이 터진다.